[고독을 부르는 공간의 사회학]<中> ‘달동네’ 떠나지 않는 사람들
닫힌 골목길 서울의 한 임대아파트에 차가 주차돼 있는 가운데 노인이 보행로에 외로이 앉아 있다. 이곳 주민 이모 씨(78·여)는 “주차장, 보행로 가릴 것 없이 차가 많고 길도 좁아 오가는 이웃이 잘 안 보인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3월 14일 서울 노원구 양지마을 주민 최종임 씨(71·여·왼쪽에서 두 번째)가 마을 한복판에 세워진 7평 크기의 조촐한 ‘만남의 광장’을 찾아 이웃들과 즐겁게 수다를 떨고 있다. 김재형 기자 monami@donga.com
○ 아파트는 외로움 상자
임대아파트 거주민의 평균 소득은 하위 20% 이하의 저소득층이다. 노인과 장애인 등 거동이 불편한 주민도 많아 생활공간은 대부분 단지 내로 한정된다. 인적 관계망이 이웃을 넘어서기 힘들다. 지난달 16일 본보가 만난 이 씨의 하루도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집 안에서 TV를 보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장보러 나가는 것이 외출의 전부였다. 그나마 아파트 인근에 복지관이 있어 가끔 이곳 ‘노래교실’에 참석해 외로움을 달랜다. 김주영 세종대 건축학과 박사는 “임대아파트는 대부분 보행로가 좁고 단지에 울타리가 쳐져 있다. 또 외부에 마트와 공원이 있어도 몇 안 되는 출입구가 엉뚱한 곳에 위치해 이를 이용하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 사람 냄새 나는 달동네
약 100채가 자리 잡은 이 마을엔 홀몸노인이 80%가량이다. 이웃들은 길에서 자주 보던 노인이 하루라도 안 보이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을 찾아 안부를 묻는다. 김희선 양지마을 통장은 “홀로 사는 노인에겐 이웃이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지지대”라고 말했다.
이날 기자가 만난 양지마을 주민들은 임대아파트로 이사할 조건이 되지만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다. 아파트가 살기에는 편하지만 문만 닫으면 고립된 섬처럼 느껴진다는 이유에서다. 정영숙 씨(71·여)는 “명절에 한 번 보는 가족보다 아플 때 한 번이라도 더 찾아와주는 이웃이 고맙다”며 “소득과 재산이 없어 (임대아파트) 입주조건은 되지만 다 늙어 이웃을 떠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마을 통장은 “정 씨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고 거들었다.
○ 사생활과 공동체의 갈림길
아파트의 외로움은 임대아파트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간 아파트의 설계와 건축은 ‘사생활 보호’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건설사들은 너도나도 ‘나만의 해방구’를 마련해 주겠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서울 성동구 옥수동에 지어진 고가의 신식 아파트가 대표적이다. 단지 구성을 차가 쉽게 이동할 수 있게 설계해 주민들은 차를 타고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고 엘리베이터로 자신의 집까지 올라간다. 단 한 명의 이웃과도 마주치지 않고 외출과 귀가가 가능한 점을 자랑거리로 내세웠다.
하지만 최근 건축업계는 아파트를 공동체 친화적으로 짓는 것에 관심을 돌리고 있다. 층간 소음, 주차 문제 등 이웃 간 소통이 안 돼 생겨나는 갈등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한 건설사 관계자는 “아파트 내 분쟁과 주민의 고독감을 줄이기 위해 단지 내에 소통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우건설이 경기 화성시에 짓고 있는 아파트에는 주민들 간 화합을 돕는 공용공간이 마련된다. 주민들이 함께 요리를 배우고 노인들이 바둑교실을 열거나 영·유아 공동육아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는 곳이다. 2008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커뮤니티시설을 대규모로 아파트 단지 내에 구축한 GS건설 반포자이 아파트 또한 같은 고민의 결과물이다.
김억 홍익대 건축학과 교수는 “사생활에만 방점이 찍혀 있던 기존 도시건축(아파트)에 싫증을 느끼고 공동체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늘자 건축의 지향점이 서서히 공공성으로 넘어가고 있는 추세”라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