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창경원의 벚꽃. 동아일보DB
당시 4월 18일은 일요일로 꽃놀이의 정점이었나 보다. 셀 수 없이 많은 행락객이 서울의 곳곳을 뒤덮었다고 96년 전의 신문은 전한다. 꽃들의 향연, 그중에서도 벚꽃은 절정을 향해 갔다. 벚꽃 놀이 명소는 도심 한가운데의 창경원이었다.
‘아침부터 창경원을 향하여 물밀어오는 사람의 물결 속에 자동차와 인력거가 뒤섞여, 헤쳐 나가지도 못할 만치 복잡한 광경을 이루었다.’
그날 하루 입장객은 2만8000명. 창경원이 일반에 개방한 이래 최대 성황이었다. 서울 인구의 10분의 1이 이날 창경원을 다녀간 것이다. 1년 전 3·1만세운동 열기 못지않은 인파였다.
일주일 전 신문은 임박한 벚꽃 개화 소식을 알린 바 있다.
‘창경원은 요사이가 한창이다. 버들과 진달래 개나리는 이미 만개하여 거룩한 복음을 전한다. 목련은 벌써 졌고, 모두가 고대하는 듯한 사쿠라꽃은 나날이 꽃봉오리가 불어가서 마치 십칠팔 세 처녀가 시집가기를 급해하는 듯이 오늘 필까 내일 필까 하여 사람의 간장을 녹이려든다.’(동아일보 1920년 4월 12일자)
지금 서울은 벚꽃 시즌이 거의 끝나는 분위기지만 그때는 막 시작한 모양이다. 창경원 관리소가 개화 일정을 최종 발표하는 것도 이맘때였다. ‘17∼18일 주말에 20%가량 필 것 같고, 23∼24일경에 반쯤 피어 가장 좋을 터이다.’
창경원에 뒤이어 벚꽃 명소로서 남산공원과 장충단공원에 벚꽃 1만여 그루가 심어지기 시작한 것이 1935년부터다. ‘먼지투성이의 뒤죽박죽 도시에서 생활하는 경성부민이 볼만한 것이 별로 없는 경성에 식수 5개년 계획을 수립’(동아일보 1935년 3월 9일자)한 것이다.
1920년대의 신문에서 벚꽃은 흔히 ‘사쿠라’로 표현했다. 낯선 외국 꽃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때문인 듯하다. 벚꽃이라는 용어는 1930년대 들어 점차 사용이 빈번해지면서 사쿠라를 대체해갔다. 점점 우리 꽃으로 동화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미세먼지 자욱한 가운데서도 전국의 벚꽃은 올해도 옛날처럼 사람들로부터 우러름을 받았다. 국내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다. 멀리 미국 땅 워싱턴에까지 벚꽃 여행 상품이 한국인들을 실어 날랐다. 일본의 도쿄 시장이 양국 친선을 위해 3000그루를 선사한 것이 효시라고 한다. 창경원에 사쿠라 2000그루가 심어진 지 몇 년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다. 그로부터 30년도 안 되어 진주만 습격과 태평양전쟁이 발발했고, 그 전쟁이 끝나고 조선은 광복을 맞았다. 그 후로도 워싱턴의 벚꽃은 팝콘 터지듯 봄마다 피어오르며 오늘날 국가적 행사로 치러지는 세계 최대의 벚꽃 축제로 자리 잡았다. 세계적으로 유독 벚꽃이 많은 세 나라의 수도라는 점에서 한미일 동맹이라 해야 할까.
광복 30년이 지나 창경원은 창경궁으로 복원되고, 거기 울창한 벚나무들은 대거 뽑히어 여의도 등지로 옮겨갔다. 창경궁은 지금 조금 남은 벚꽃으로 일제강점기 때처럼 야간에까지 개장하며 피곤하고 근심 어린 도시인을 맞는다. 여의도의 벚꽃들과 함께.
박윤석 역사칼럼니스트·‘경성 모던타임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