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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윤신영]과학혁명시대, 상사와 선배의 역할

입력 | 2016-04-12 03:00:00


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2012년 ‘신의 입자’라 불리던 힉스 입자가 발견된 지 몇 달 뒤였다. 당시 관측을 이끈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소장을 인터뷰했는데, 아주 인상적인 경험을 했다. 대화가 영감 넘쳐서가 아니었다. 동석한 연구원들의 ‘지방방송’이 어찌나 시끄러운지 인터뷰가 중단됐던 거다.

연구원들은 바로 옆자리에서 자신들만의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엔지니어와 과학자를 합쳐서 내부 인력만 2000명이 넘는 거대한 국제연구소의 소장, 그것도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은 뛰어난 성과를 낸 연구그룹의 리더가 외국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자리였는데, 연구원들은 자리에 놓인 과자를 먹으며 거의 카페에서처럼 신나게 이야기를 했다. 정말 신나게 했다. 가끔은 인터뷰 중인 소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깔깔 웃기도 했는데, 이때 연구원들이 소장을 가리키는 말은 ‘저 사람(That guy)’이었다.

그쯤 되자 소장도 말이 꼬이는지 잠시 인터뷰를 중단하고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결코 나무라거나 기분 나쁜 투는 아니었고, 연구원들도 수다를 중단하지 않았다.

불쾌했다는 게 아니다. 나는 오히려 신선하고 좋았다. 한국은 이런 경험을 하기 힘들다. 크든 작든 연구그룹이나 기관의 수장을 인터뷰했을 때를 떠올려 본다. 자리는 40dB(데시벨) 이하의 고요한 상태를 유지한다(조용한 사무실에서 공조기만 작동할 때의 소음이 이 정도다). 옆에는 수행을 위해 비서나 홍보팀장이 앉아 있다. 질문에 대비해 몇몇 수석급 연구원이 동석해 있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언제든 찌르면 답을 내놓겠다는 비장한 표정으로 예의 바르게 인터뷰 끝까지 함께한다. 한국 정서에서, 이들이 묻지 않은 말을 한마디라도 하는 경우는 보기 힘들다. 앞에 놓인 다과는 자리를 빛내는 장식이다.

물론 극단적인 비교지만, 문화의 차이가 보였다. 한국에서 상사나 선배의 말은 잠언처럼 받들어야 하는 대상이지 토론이나 반박의 대상이 아니다. 대화에 끼어들거나 방해해도 안 된다. 조직에 결코 득이 될 것 같지 않은, 상황 판단이 정확하지 않아 보이는 임무를 주문받을 때에도 다른 의견을 내기란 힘들다. 중장년층을 대접하고 따르는 게 결국 진화의 관점에서 이로웠다는 인류사적 경험에, 윗사람의 말에 공손하라는 동아시아의 문화사적 전통이 어우러져 낳은 분위기다. 어렵게 반박이나 토론을 시도해도 “당신이 뭘 아는데”, “내가 해봐서 아는데”, “나 때는 말이야” 3종 세트면 게임은 끝난다.

그러다 보니 많은 일들이 중장년층의 의중에 따라 흘러가고 젊은 층은 그걸 실현시키느라 바쁜 경우가 많다. 현대 사회에서 이런 행동은 마냥 선이 아니다. 중년, 장년의 의견에 무조건 따라야 했던 건 그들이 갖춘 경험과 지혜가 생존에 절대적으로 요긴했던 시대의 이야기다. 후기구석기 시대에는 분명 그랬고, 근대 초기에도 그랬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묵혀 숙성시킨 지식 못지않게 빠르게 치고 나갈 수 있는 날렵한 정보가, 두터운 권위 못지않게 기발한 아이디어가 일을 완성할 수 있게 해준다. 더구나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변모하는 분야라는, 과학이 그 대상 아닌가.

오늘날 젊은 학자들은 그들의 상사나 선배보다 결코 적게 배우지 않았고, 아이디어도 많다. 그들이 떠들게 하자. 높은 직위의 상사는 감독이다. 하나하나 지시하지 말고, 선수들이 알아서 주장을 정해 마음껏 경기에 임할 수 있도록 하자. 좋은 감독이 할 일은 그들을 관리하고 침묵하게 하는 게 아니라, 뛸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ashill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