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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지하대피소가 만남의 공간으로… ‘수다 꽃’이 활짝

입력 | 2016-04-12 03:00:00

[고독을 부르는 공간의 사회학]<下>이웃 단절 넘어서는 ‘소통 실험’




지하 벙커가 문화센터로 지난달 22일 서울 도봉구 방학동 극동아파트 지하 문화센터에서 손뜨개질 수업이 진행됐다. 2013년 습기가 차고 허름한 지하 대피소를 개조해 만든 문화센터는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 반상회 장소 등이 마련돼 주민들이 자주 찾는 만남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조용하던 아파트가 왁자지껄 아이들 노는 소리로 떠들썩했다. 인근 마을 주민들이 문화강좌를 듣기 위해 수시로 아파트를 오갔다. 집에만 있던 노인들도 젊은 엄마들에게 전통음식 만드는 법을 가르치겠다며 지팡이를 짚고 나섰다.

167채가 모여 사는 서울 도봉구 방학동 극동아파트 주민 이미실 씨(55·여·마을활동가)는 2013년을 잊지 못한다. 1980년대 초 지어진 이 아파트에 그해 약 70평 넓이의 지하 대피소를 문화센터(햇살문화원)로 개조하며 찾아온 변화가 엄청났다. 그동안 얼굴도 모르고 지내던 주민들이 이곳에 모여 서로 안부를 물으며 친분을 쌓기 시작했다는 게 이 씨의 설명이다.

○ 쾨쾨한 지하에 들어선 소통의 장

주거의 편리함만 강조하다가 이웃과의 단절을 초래하는 아파트로 지어졌어도 주민들이 어떻게 공간을 활용하느냐에 따라 삶은 크게 달라질 수 있었다.

극동아파트처럼 1980년대에 지어진 아파트엔 지하에 대피소가 마련돼 있다. 남북 대치 상황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속칭 ‘지하 벙커’로 불리며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대부분 거미줄이 쳐져 있고 곰팡이가 생겨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이다. 지난달 22일 찾은 극동아파트 ‘지하 벙커’는 달랐다. 문을 열자 하얗게 칠해진 벽면에 주민들이 손수 만든 공예품이 걸려 있었다. 문화센터로 변신해 있었던 것이다. 이 씨는 “개조 공사 초기엔 소음 탓에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지만 ‘우렁각시’처럼 이곳에 들러 청소하고 가꾸고 가는 주민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만큼 이웃과 소통할 공간을 원했던 주민이 많았다.

문화센터 한쪽 방에선 주민 6명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손뜨개질 수업을 듣고 있었다. 문윤선 씨(36·여)는 “처음 이곳에 이사 왔을 땐 어린 아이를 키우느라 힘들어 우울증이 왔다. 외출을 할 수도 없어 친구와 전화로 외로움을 달래곤 했다”며 “이제는 이곳에서 아이는 친구끼리 놀고 나는 또래 엄마들과 수다를 떨 수 있게 돼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손뜨개질 등 주민들의 재능기부로 열리는 다양한 문화강좌는 아파트 주변 주민들까지 이곳으로 모여들게 했다. 인근 마을에 살고 있는 정희경 씨(52·여)는 “문화강좌도 열리고 수다도 떨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며 “덕분에 아는 이웃이 늘어 요즘은 심심할 새가 없다”고 전했다.

극동아파트 원영례 관리소장(동우개발)은 “강의가 없는 날에도 30여 명의 주민이 수시로 이곳을 찾아 쉬어간다”며 “특히 그간 소외됐던 노인들도 이곳에서 젊은 주민들과 어울려 노는 모습이 가장 달라진 모습”이라고 전했다.

○ ‘소행주’의 소통 공간 철학


문만 열면 이웃과 소통 서울 마포구 성산동 소행주 입주자 박흥섭 씨(55·왼쪽)가 집 안 계단에 앉아 있는 가운데 열린 현관문을 통해 이웃집 아이가 복도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인다. ‘소행주’(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는 복도와 계단을 신발을 벗고 이동할 수 있도록 설계해 이웃 간 소통을 활성화시켰다.

이웃 간의 소통을 위해 아예 새로운 건축을 시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2011년 서울 마포구 성산동 성미산 마을에 처음 들어선 코하우징(공동 주거) 주택 ‘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소행주)’이 대표적이다. 이곳 입주자들은 건물 설계부터 입주 후 관리까지 도맡아 한다. 건물 안을 한 마을처럼 만들어 보자는 취지로 복도와 계단, 옥상 등을 소통하기 쉽게 디자인했다.

‘소행주’의 건축 철학은 ‘따로 또 같이’로 요약된다. 각자의 생활을 존중받으면서도 필요할 땐 이웃과 소통하며 살아간다는 뜻이다. 우선 이곳 주민들은 자신에게 할당된 공간 중 1평씩을 떼어내 커뮤니티실(씨실)을 만들었다. 저녁이면 이곳에선 직장일로 바쁜 입주민들을 위한 식사가 제공된다. 식사 준비하는 시간을 아껴 각자의 밤 시간을 보장해주자는 취지다. 그 덕분에 자녀의 식사를 챙기기 힘든 이곳 맞벌이 부부들은 걱정을 덜었다. 이곳은 시간에 따라서 아이들의 독서실과 놀이터가 됐다가 입주민들의 회의실이자 수다 장소로도 쓰인다.

옥상엔 공동 바비큐 시설 ‘소행주’의 옥상은 넓게 설계돼 주민들이 텃밭을 꾸미고 바비큐 파티를 열 수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신발장을 집 밖에 설치하고 복도와 계단 바닥을 목재로 꾸며 신발을 벗고 이동할 수 있게 한 점도 눈에 띄었다. 이곳에서 만난 아이들은 복도에 주저앉아 같이 숙제하거나 장난을 치고 있었다. 빨래 건조대를 놓아 둔 집도 있었다. 엘리베이터까지 걸어가는 통로일 뿐이던 공간을 사람이 활동하는 장소로 만든 것이다. 옥상엔 여행용 캐리어 등 자주 쓰진 않지만 집 안에 두기엔 부담스러운 물건을 두는 공용 창고도 마련했다. 버리는 공간을 최소화해 이를 사람이 활동하는 장소로 사용하자는 의도이다. 또 여름이면 텃밭을 꾸미고 주민끼리 바비큐 파티를 열 수 있게 옥상을 설계했다.

소통을 강조하면서도 사생활 보호를 놓치진 않았다. 각자의 집은 문만 닫으면 아파트와 다를 것 없이 외부와 철저히 차단됐다. 집들이 복도를 사이에 두고 서 있는 구조라 소음 걱정도 적다. 주민들은 각자 생활을 즐기다가 외로워지거나 이웃의 도움이 필요할 때 커뮤니티실이나 이웃집을 찾는다. 윤상석 씨(39·성산동)는 “내 생활을 보장받으면서도 가끔 고향에서처럼 마음 맞는 이웃과 어울리며 외로움을 덜고 싶어 이곳에 이사 왔다”고 말했다.

‘소행주’는 아파트와 빌라 일색인 고립된 주거환경에 싫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면서 5년 만에 성산동을 넘어 경기 과천시 등지로 확산돼 모두 8곳으로 늘었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9호가 들어설 예정이다. ‘소행주’ 건설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류현수 공동대표는 “지금까진 주로 아이들 교육문제로 주거지를 선정하고 자주 이사를 다녔지만 점점 꾸준히 한집에 살면서 자식까지 함께 살 수 있는 주거공간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며 “아파트로 대변되는 기존 단절식 건축이 소통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말했다.

김재형 기자 mona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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