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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과 놀자!/과학이 보이는 CSI]빨간색 글씨로 쓴 협박편지… 범인은 과연?

입력 | 2016-04-13 03:00:00

크로마토그래피의 활용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중학교 3학년 A 군이 하교 후 집에 가서 가방을 열었더니 빨간 글씨로 ‘나를 괴롭혔으니 가만두지 않을 거야’라고 쓰인 협박편지가 나왔다고 해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학교에서 사소한 일로 다투었던 친구 B, C, D 군이 머리에 떠올랐죠. 협박편지가 빨간색 글씨로 적혀 있는 것이 눈에 띄었고요. ‘그러면 빨간색 볼펜이 있는 친구가 범인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본인이 셜록 홈스가 된 것 같았습니다. 다음 날 학교에 가서 셋을 만난 A 군은 협박편지를 누가 보냈는지 알아야겠다며 필통을 보여 달라고 했죠. 놀랍게도 모두의 필통에서 빨간색 볼펜이 나왔어요. 하지만 제조 회사가 모두 다르다는 차이점과 유성펜이란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볼펜의 잉크는 다양한 성분으로 구성돼 있는데 잉크의 색깔을 내는 안료나 염료인 착색제가 있고, 잉크의 건조성, 유동성을 향상시킬 목적으로 함유되는 용매가 있습니다. 볼펜의 잉크는 약 50%가 색소로 구성돼 있으며 착색료에는 유기 염료와 무기 염료가 있는데 검은색은 카본 블랙이라는 검댕이 착색제로 주로 쓰이죠. 또 필기구에 유성펜이라고 쓰여 있으면 잉크가 물에 녹지 않고 기름이나 용매에 녹는 유성잉크가 사용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림]

그러면 어떻게 3개의 다른 볼펜에서 나온 빨간색을 분석해 협박편지의 빨간색과 구별할 수 있을까요? A 군은 초등학교 때 여과지에 사인펜으로 점을 찍고 여과지 물기둥을 만들어 물에 넣은 다음 물이 퍼짐에 따라 사인펜의 색이 색깔별로 펼쳐지는 실험을 한 것과 분필에 사인펜으로 점을 찍고 물을 올라가게 하면 색깔이 층층으로 펼쳐지는 것을 실험한 것이 생각났습니다. 바로 초등학교 3학년 때 배웠던 ‘혼합물의 분리’를 이용한 필기구의 색상 구별법이었죠. 하지만 볼펜이 모두 유성펜이라 물을 사용해서는 유성잉크가 녹지 않기 때문에 빨간색을 분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물 대신 알코올 등의 유기 용매를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죠. 그런데 초등학교 때 사용한 것 같은 종이를 사용하면 종이를 유기 용매에 넣을 수 없어 어떻게 할까 하다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얇은 막 크로마토그래피를 이용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A 군은 협박편지에 쓰인 ‘가만두지 않을 거야’라는 글씨를 B, C, D 군의 볼펜으로 ‘협박 편지와 같은 종이에 썼습니다. 그리고 이 글씨가 있는 부분의 종이를 오려 유성잉크가 녹아 나올 수 있게 에틸알코올에 담가 뒀죠. 그랬더니 놀랍게도 빨간색 글씨에서 빨간 색깔이 알코올에 녹아 나왔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A 군은 얇은 막 크로마토그래피를 준비했습니다.

높이 10cm, 넓이 5cm로 자른 얇은 막을 준비하고, 여기에 알코올에 녹아 나온 색을 얇은 막의 아랫면에서 1cm가량 떨어진 지점에 점적 유리관을 이용하여 점적(시료 용액에 시약을 한 방울씩 떨어뜨리는 일)했습니다. 얇은 막에 2회 또는 3회 점적한 알코올이 다 건조되기를 기다린 다음 이 얇은 막을 유기 용매가 든 유리통에 잘 세워 넣었고요. 유기 용매가 서서히 위로 진행되면서 점적한 지점을 지나 약 8cm까지 올라간 다음 얇은 막을 꺼냈죠. 유기 용매의 냄새가 심해 건강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이 실험은 환기구가 있는 곳에서 실시했습니다. 유기 용매를 다 날려 보내고 얇은 막을 보니 그림과 같이 협박편지에서 보인 빨간색은 B, C 군과 비교할 때 맨 아래 부분의 빨간색과 상단의 색과는 일치하지만 중간에 있는 점과 맞지 않아 B, C 군의 볼펜과는 다른 것을 알 수 있었죠. 하지만 D 군의 볼펜과는 색의 위치와 패턴이 일치하는 것이 보였어요. 좀 더 확실한 결과를 보기 위해 얇은 막을 자외선 광선(254nm)에서 보았더니 [그림]과 같이 오렌지색 점이 협박편지와 D 군의 볼펜에서 나타났고요.

이와 같이 눈으로 보기에 같은 빨간색 글씨라도 사용한 볼펜의 제조회사가 다르면 크로마토그래피 방법으로 알아낼 수 있기 때문에 범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볼펜이 같은 회사에서 비슷한 시기에 생산되었다면 차이를 발견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람이 농약이나 독극물을 복용하고 사망한 경우 혈액이나 소변에서 약물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혈액 속의 단백질 등 많은 성분 중 약물만을 분리해야 하기 때문에 크로마토그래피가 주로 사용됩니다. 또 마약 복용 여부를 판정할 때 소변, 모발에서 마약 성분만을 분리하기 위해서도 사용됩니다. 음주운전을 했는지 혈중 알코올 농도를 측정할 때도 그렇죠. 가짜 참기름, 가짜 꿀 등을 확인하는 데도 쓰입니다. 이 외에도 뺑소니 사고가 생기면 뺑소니 차량과 피해 차량에 묻어 있는 페인트 조각에 대해 크로마토그래피를 활용하여 뺑소니 차량 범인을 잡기도 합니다.

이런 방법은 지난해 7월 경상북도 상주에서 발생한 상주 농약 사이다 사건에서도 쓰여 페트병에 든 사이다, 드링크제, 구토물에서 범죄에 쓰인 농약인 메소밀을 분리하는 성과를 냈답니다.
 



정희선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