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 음식평론가
후추는 호초(胡椒)라고 불렀다. ‘초(椒)’는 산초가루 등 매운맛의 향신료를 의미한다.
후추는 약으로도 사용했다. 조선 말기의 하재 지규식(1851∼?)은 ‘아내가 밤새 기침을 하며 숨이 차, 후추(호초) 가루에 꿀을 타 떡을 만들어 수시로 먹게 했다’고 ‘하재일기’에 적었다. ‘산림경제’에서는 ‘바람이 심하게 불고 습한 곳에서는 후추 두세 알을 물고 이와 혀로 문지르면 매운 기운이 오장에 들어가서 나쁜 기운을 막는다’고 했다. 급작스러운 복통에도 ‘후추 달인 물’을 사용했다. 영조는 여름철 찬 음식을 먹고 설사를 만났다. ‘영조실록’에는 ‘후추차(茶)를 마시고 조금 멎었다’고 했다. ‘구급이해방’에서는 지네, 전갈 등 벌레에 물렸을 때 후추를 갈아서 문지른다고 했다.
호초는 ‘북쪽 오랑캐 땅에서 나는 매운맛의 향신료’라는 뜻이지만 실제 생산지는 따뜻한 남만(南蠻) 지역이었다. 고려시대부터 쓰시마 섬이나 류큐(琉球·지금의 오키나와 일대) 등에서 오는 사신들이 한반도에 전했다. 형식은 조공이지만 실제로는 무역품이었다. 그들은 후추를 가지고 와서 쌀이나 잡곡, 베, 때로는 불교 경전 등과 바꾸었다. 조선 말기까지 후추는 남쪽에서 공급되었다.
조선 조정의 고민은 쓰시마나 류큐와 외교적 단절이 있을 경우였다. 이 경우 일상적으로 널리 사용하는 후추를 구하기 어렵다. 후추 모종(胡椒種)이나 재배할 수 있는 후추 씨앗을 구해야 한다.
후추 모종에 대해 지나칠 정도의 집착을 보인 이는 성종이다. 성종 12년(1481년) 8월 성종이 말한다. “후추는 약을 조제할 때 필요하니 그 종자를 왜인에게 구하면 좋겠다.” 신하가 답하기를 “후추는 왜인이 많이 가지고 와서 창고에 가득하니, 종자를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종의 생각은 다르다. “만일 왜인들과 틈이 생기면 앞으로는 구할 수 없다.” 모종을 구하여 직접 재배하자는 뜻이다. 이듬해에도 후추 모종이 거론된다. 예조의 보고다. “일본국 사신에게 후추 모종을 말했더니, ‘후추는 남만에서 생산된다. 유구국도 남만에서 사서 일본에 전한다. 종자를 얻기는 어렵다’고 한다.” 남만은 섬라(태국의 샴 제국), 안남(베트남)을 포함한 동남아 일대를 의미한다.
이듬해, 쓰시마에서 온 사신이 후추 모종을 구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구체적으로 요구한다. “남만에 사신을 보내어 후추 씨를 구하고자 하는데, 거리가 멀어 3년이 걸린다. 식량으로 무거운 쌀을 싣고 갈 수는 없다. 동전 2만 꿰미를 내려 달라.” 성종은 거부한다. 후추 모종은 두고두고 속을 썩인다. 후추 씨를 구해줄 테니 불교 경전을 구해 달라는 일본 측의 기록도 나온다. ‘남만에서 생산된다’는 말을 믿고 중국 측에 남만의 후추 모종을 구할 수 있는지 물어보기도 한다.
삶은 씨앗으로 싹을 틔우기는 불가능하다. 설혹 제대로 된 모종을 구했더라도 기후 때문에 재배가 어려웠을 것이다. 후추 모종을 구해서 재배하는 일은 무망한 짓이었다.
황광해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