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의 여왕’ 심판한 이번 총선… 대통령은 국민에게 사과할까 세월호 참사 뒤 첫 국무회의서… 내 탓 없이 공직자만 질타 “사과” 진언한 친박은 없었나 좌파의 전유물 ‘싸가지 없음’ 이젠 싸가지 없는 친박 때문에 투표 안 하고, 안 찍은 보수 많다
김순덕 논설실장
여당의 참담한 패배 다음 날 청와대 대변인이 “20대 국회가 민생을 챙기고 국민을 위해 일하는 새로운 국회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유체이탈 화법으로 발표한 논평은 국민의 기대에 턱없이 모자란다. 이번에도 국민의 뜻을 받아들인다면 대통령은 지금까지 국회 탓만 해온 국정운영을 사과하고 수평적 당청 관계, 국회와의 관계를 모색하겠다고 말해야 한다.
2년 전 4월 16일 일어난 세월호 참사 이후를 복기해 보면, 그럴 것 같지가 않다. 참사 뒤 첫 수석비서관회의가 열린 22일 대통령은 “실종자 가족들을 만났더니 공무원들에 대한 불신이 너무나 컸다”며 공직사회를 강하게 질타했을 뿐 ‘내 탓’은 없었다. 대통령이 “국민 여러분께 죄송스럽다”고, 그것도 국무회의 모두발언으로 사과하기까지는 무려 13일이 걸렸다.
당시 동아일보 사설은 대통령 담화에 결정적 한마디, “나부터 바꾸겠다”가 없다고 지적했다. 그때 대통령이 확 달라졌다면 오늘날 ‘박근혜 선거’에서 참패하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세월호 대책을 논의한 5월 국무회의에서 내각 일괄사퇴를 진언했던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면직되면서 대통령 앞에서 할 말을 하는 사람은 사라졌다. 문창극 전 총리 후보자에 대한 청와대 대응이 합리적 보수층마저 등을 돌리게 만들면서 그해 6월 말 서울지역 대통령 지지도가 총선 전날(39%)과 맞먹는 37%였다.
그 사이 살판난 사람들이 대통령 듣기 좋은 말만 쏟아내는 친박(친박근혜)계다. 대통령 앞에서는 “아니 되옵니다” 못하면서 천년만년 영화를 누리겠다는 욕심을 싸가지 없이 쏟아내는 걸 보면 놀랍다. 더불어민주당이 선거에 판판이 지던 작년까지 ‘싸가지 없다’는 말은 좌파의 전유물이었다. 지난해 정대철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은 “싸가지란 장래성, 바른 예의, 올곧음, 떳떳함”이라며 텃밭인 광주에서조차 패배한 이유는 싸가지의 부재 때문이라고 했다. 4년 전 총선에 지고 나서도 “부산 젊은이들이 ‘나꼼수’를 안 들어서 낙선했다”는 싸가지 없는 발언에 건전한 상식을 가진 시민은 치를 떨었다.
이번 총선에서 민심은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오만’을 심판했다지만 청와대 ‘문고리 비서진’을 청와대 ‘얼라’라고 했다는 것이 공천 탈락 죄목이 되고, 남의 상가(喪家)에서 물갈이론을 역설하고, TK(대구경북)와 서울 강남에 새누리표 작대기를 꽂아놔도 찍으라는 TKK 패권주의를 오만이라고 불러주는 건 얼토당토않은 ‘존대어’다.
새누리당이 참패한 지금도 공천관리위원장을 맡아 칼춤을 추었던 이한구가 “청와대는 공천에 개입하지 않았다”며 ‘개혁 공천’에는 잘못이 없고 유승민, 김무성에게 패인을 돌리는 것도 싸가지 없기는 마찬가지다. 총선 결과보다 박근혜 대통령의 성공이 중요하다던 그들이 이젠 싸가지 없이 당권 쟁탈전에 나서는 걸 보면 정말 대통령과 당과 국가에 관심이나 있는지 의문이다.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는 대통령이 이런 싸가지에 레이저를 쏘지 않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