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 스타터(Slow Starter). 일본에서 많이 쓰이다 국내 스포츠에서도 자리를 잡은 말이다. 작고한 조해연 한국야구위원회(KBO) 원로자문위원의 저서 ‘우리말 야구용어 풀이’에는 ‘시즌 초반에는 성적이 부진하지만 경기를 거듭할수록 본래의 실력을 발휘하는 사람’이라고 돼 있다. 선수에서 팀으로 쓰임새를 넓히면 최근의 프로야구 삼성이 전형적인 슬로 스타터다. 2011년부터 2014년까지 4년 연속 통합 우승을 차지했을 당시 삼성의 4월 성적은 각각 3위, 6위, 4위, 6위였다. 삼성은 중위권에서 칼을 벼리다 날이 더워지는 6월부터 ‘본래의 실력을 발휘’하며 순위표 상단으로 치고 올라갔다. 지난해에는 슬로 스타터답지 않게 출발부터 1위 경쟁을 벌여 정규리그 정상에 올랐지만 막상 한국시리즈에서는 웃지 못했다.
▷프로축구 슬로 스타터로는 단연 FC서울이 꼽힌다. 서울이 시즌 개막 후 6경기를 치렀을 때 성적을 보면 지난해는 2승 1무 3패(승점 7)로 12개 팀 중 8위였다. 2014년에는 1승 2무 3패(승점 5)로 9위였고, 2013년에는 4무 2패(승점 4)로 14개 구단 중 12위였다. ‘시즌 초반에는 성적이 부진하지만’이라는 전제를 충족시키고도 남는다. 반면 같은 기간 최종 순위는 4위(2015년), 3위(2014년), 4위(2013년)였다. K리그 클래식 상위 스플릿 6개 팀은 이변이 없는 한 기업구단들의 몫이다. 최근 2년 동안 선수 평균 연봉(추정)이 2억 원이 넘는 구단은 전북, 수원, 서울, 울산이다. 따라서 서울이 3, 4위라면 못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잘한 것도 아니다.
▷서울은 2012년 정규리그에서 우승했다. 그때도 슬로 스타터였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개막전에서 대구에 패한 뒤 바로 3연승을 거두며 4경기 만에 선두로 올라섰다. 이후 수원과 전북 등에 선두를 내줬지만 8월 중순부터 다시 선두로 나서 끝까지 1위를 놓치지 않았다. 서울은 넬로 빙가다 감독이 이끌던 2010년에도 우승했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개막 2연승을 거두며 기분 좋게 시작했다. 여름에 주춤하며 5위까지 떨어졌지만 가을바람과 함께 ‘본래의 실력’을 발휘하며 끝내 우승컵을 안았다. 우승과 우승 사이였던 2011년에는 어땠을까. 개막 3경기에서 1무 2패로 부진했고, 5월까지 10위(당시는 16개 팀) 아래로 처져 있다 5위로 시즌을 마쳤다.
이승건 기자 w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