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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스케치]아침마다 시원하게… 키위야, 변비를 부탁해!

입력 | 2016-04-23 03:00:00

뉴질랜드 제스프리 연구소서 본 ‘키위의 비밀’




뉴질랜드 국립식품과학연구소 티푸키 분소에서 개량 중인 ‘매운 키위’. 전문가들은 전국 단위 영농조합을 통한 대규모 연구개발을 뉴질랜드 키위 농업의 성공 요인으로 꼽는다. 티푸키=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스파이시(매운) 키위’라며 먹어 보라고 권한다. 키위는 키위인데 500원짜리 동전 크기였다. 매워 봤자 키위지, 내가 김치로 입맛 다진 한국인이야 하며 입에 쏙 넣었다. 10초 후 기자의 눈, 코, 입에서 회한이 담긴 액체가 동시에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씹는 느낌은 덜 익은 고구마 같은데 맵기는 청양고추 이상이었다. 화생방 훈련을 받을 때가 잠깐 떠올랐다. 14일 찾은 뉴질랜드 국립식품과학연구소 티푸키 분소에서 맛본 ‘별종 키위’ 중 하나다.



온갖 별종 모인 키위연구소

뉴질랜드 기업혁신고용부(MBIE)와 키위 전문 기업 ‘제스프리’가 연간 350억 원가량을 들여 운영하는 연구소 18곳 중 하나인 이곳에선 신품종 키위 수십 종이 동시에 개발되고 있다. 딸기와 접목해 속이 빨간 ‘레드키위’, 털이 없는 ‘대머리키위’, 길쭉한 ‘대추키위’…. 포도처럼 작아 껍질째 먹는 ‘키위베리’는 최근 시장에 내놓았지만 너무 물러 강도를 개량하고 있다. 유전자 조작이 아닌 접붙이기로만 품종을 개량하기 때문에 상품화할 만한 품종 하나를 만드는 데 평균 10년이 걸린단다.

뉴질랜드 정부와 업계가 품종 개량에 이렇게 공들이는 이유는 이 나라의 한 해 키위 수출 규모가 1조4200억 원으로 단일 원예 작물 중 가장 크기 때문이다. 점유율은 전 세계 키위 시장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성공적인 신품종이 나오면 수출 곡선이 춤을 춘다. 대표적인 게 꼭지가 뾰족한 ‘골드키위’다. 15년에 걸쳐 개량했다. 2013년엔 골드키위를 둥글게 만들고 영양소 함량을 개선한 ‘선골드키위’도 나왔다.

신품종은 기존 품종을 업그레이드하는 데도 활용된다. ‘비타민키위’는 한 알에 비타민C가 1일 권장량(100mg)의 10배 가까이 들어 있지만 아무 맛도 나지 않아 디저트로는 탈락이다. 그 대신 연구진은 기존 품종에 이 키위를 접붙여 맛도 좋고 비타민C도 많이 든 키위를 내놓으려고 노력 중이다. 그럼 매운 키위는 대체 왜 만들까? 연구소 관계자는 “영업 비밀(It‘s classified)”이라고 했다.



‘키위 vs 변비약’, 승자는?

남반구의 가을은 키위 수확철이다. 14일 뉴질랜드 타우랑가 시 인근의 한 키위 과수원에 키위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키위는 비타민C가 많이 들어 있고 변비에 효과가 좋은 과일로 알려져 있다. 타우랑가=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뉴질랜드 학계에서는 키위의 영양소와 효능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다. 12∼14일 타우랑가 시에서는 메시대 산하 리뎃연구소 주최로 ‘제1회 키위 효능 연구 국제 심포지엄’이 열렸다. 미국 이탈리아 등 16개국에서 영양학자와 대장항문외과 전문의 등 200여 명이 참가한, 단일 과일을 주제로 한 첫 국제 심포지엄이었다.

이 자리에선 ‘변비 해소 끝판왕’이라고 불리는 질경이씨(실리움)를 원료로 한 변비약과 키위의 대결 결과가 공개됐다. 뉴질랜드 오타고대의 리처드 기어리 교수팀이 성인 60명을 두 집단으로 나눠 4주간 각각 변비약과 키위를 먹도록 한 것. 결과는 무승부에 가까웠다. 변비 환자들의 주간 배변 횟수는 실험 전 평균 0.3차례에서 변비약 복용 후 2.9차례, 키위 섭취 후 2차례로 각각 늘었다. 음식물이 대장을 통과하는 시간이 들쭉날쭉했던 피험자들도 키위 섭취 후 정상 범위로 회복됐다. 이 시간이 너무 길면 변비가, 너무 짧으면 설사가 생긴다.

이우용 삼성서울병원 대장암센터 교수는 “키위가 병·의원에서 자주 처방하는 실리움 변비약을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은 의미 있는 결과”라고 말했다.

이는 키위에 수용성 식이섬유가 불용성보다 4배 정도 더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식이섬유가 수분을 많이 흡수할수록 장운동이 활발해지고 변이 부드러워진다. 키위에는 천연 단백질 분해 효소인 액티니딘이 들어 있어 식사 후 더부룩한 느낌을 줄이고, 유산균의 먹이가 되는 프리바이오틱 역할도 하기 때문에 대장 내 ‘미생물 생태계’에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달콤한 키위가 혈당 억제한다?

전 세계가 ‘당뇨병 비상’에 걸리면서 키위가 혈당에 미치는 영향도 관심사로 떠올랐다. 최근 세계보건기구(WHO)는 올해 보건의 날 주제를 당뇨병으로 정했고, 한국 정부도 당뇨병을 유발하는 설탕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심포지엄에서는 “키위에도 천연 당이 들어 있기 때문에 지나치게 많이 먹는 것은 좋지 않지만 하루 두 개는 오히려 혈당 억제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기본적으로 키위는 혈당지수(GI)가 38∼39점인 저혈당(GI 55점 이하) 과일이다. 키위 한 개(100g)가 혈당에 미치는 영향은 포도당 6g과 비슷한 정도다. 혈당지수는 음식을 먹었을 때 혈당이 얼마나 올라가는지를 표시한 수치인데 파인애플은 65점, 수박은 60점, 바나나는 55점 정도다. 장에 흡수되지 않고 남아 소화불량을 야기하는 올리고당, 이당, 단당을 뜻하는 ‘포드맵’ 수치도 사과 복숭아 등보다 훨씬 낮다.

여기에 식용식물연구소의 존 먼로 선임연구원은 키위의 식이섬유 조직이 사과나 파인애플 등 다른 과일보다 부드러워 식이섬유 잔류물이 몸속에서 원래 부피의 4배 가까이 팽창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다른 음식물이 당으로 분해되는 속도를 늦추기 때문에 혈당 작용을 완화한다는 것. 키위 한 개에는 탄수화물도 12g 정도 들어 있어 디저트로 먹으면 쌀밥 두 숟갈 분량의 탄수화물을 대체하는 효과도 있다. 전분을 소화시킬 때 부수적으로 생성되는 포도당의 양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당뇨 억제에도 도움이 된다. 키위에 들어 있는 칼륨은 혈압 유지를, 엽산은 임신부의 빈혈 예방을 돕는다.



“전국 단위 영농조합이 힘”

뉴질랜드가 연구개발에 거액을 투자할 수 있는 것은 미네랄이 풍부한 토양과 일조량이 많은 기후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국의 키위 농가 2700여 곳이 뭉친 단일 영농조합의 덕이 크다. 농가들은 1970년대 오일쇼크를 거치며 키위 가격이 떨어지자 1988년 수출 창구를 단일화했고, 1990년엔 마케팅과 연구개발 기능까지 통합한 제스프리를 설립했다. 농가가 지분을 100% 소유하는 구조다. 사무직원은 본사와 해외 지사를 통틀어 400여 명에 불과하고 오히려 연구 인력이 두 배가 넘는 900여 명이다.

자국 내 농가끼리 가격경쟁을 할 필요가 없으니 경쟁 상대 자체가 달라진다. 영양소의 함량과 효능을 놓고는 다른 과일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변비약 등 의약품과 경쟁하고, 디저트 시장에서 아이스크림 등과 경쟁하는 게 아니라 쌀, 빵, 고구마 등 식사를 일부 대체할 수 있는 식품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식이다. ‘키위 쇠고기말이’ ‘연어 키위 롤’ 등 키위를 활용한 레시피를 개발해 홈페이지에 공개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농산물을 브랜드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많지만 제스프리만큼 성공한 사례는 찾기 힘들다. 소비자가 시군 단위로 잘게 쪼개진 브랜드를 일일이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소유와 경영이 일원화된 국내 농업 구조를 주된 원인으로 본다. 규모가 커질수록 전문 경영 노하우가 절실해지는데, 영농조합끼리 사업 영역을 합쳐 지주조합을 만들거나 경영권을 위임하기를 꺼리기 때문이다. 낙농 분야에는 연매출 1조 원 규모의 대형 지주조합이 있지만 도축장과 사료 공장을 대형화하는 데 그치고 연구개발에는 충분한 자원을 투입하지 못하고 있다.

최영찬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한국에도 ‘제주 감귤’이나 ‘접목선인장’(다른 성질의 선인장을 교배해 다양한 색을 낼 수 있도록 키운 것)과 같은 전 세계 생산량 1위인 농산물이 있다”며 “정부가 제스프리뿐 아니라 오렌지와 포도 농가가 모여 만든 협동조합인 미국의 ‘선키스트’와 ‘웰치스’를 벤치마킹해 대형 지주조합의 탄생을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티푸키·타우랑가=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