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의 대가 조 순 前부총리
한없이 따뜻한 미소를 짓다가도 청년 실업 등 한국 경제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길고 흰 눈썹 아래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도전하며 살았다”는 조순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은 청년들에게도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박용 기자
“새 길을 찾는 청년정신 키워야”
―요즘 청년들이 고민이 많습니다.
―청년실업이 최악인데요.
“당장 호전시킬 방법은 없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중소기업을 지키지 못했어요. 대통령 임기 중에 그걸 해서 잘했다는 소리 듣기 어려우니 모두 안 했습니다. 정권마다 ‘우리가 중소기업 (육성)하겠다’고 했지만 비과학적이고 일방적이었습니다. 자금만 대주는 게 정책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 게 수십 년 쌓인 거예요.”
하얀 눈썹에 ‘산신령’같이 온화한 표정의 조 전 부총리는 청년 실업 얘기가 나오자 책상을 내리쳤다.
―노태우 정부 때인 1988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 취임할 때도 중소기업 육성을 강조하셨는데요.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를 그만두고 부총리로 입각한 이유를 묻자 조 전 부총리는 ‘士’(선비 사)와 ‘仕’(벼슬할 사)를 종이에 적었다. “선비는 국가가 부르면 가야 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하지만 육사 교관 재직 시절 제자인 전두환 대통령이 측근을 통해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참여를 세 번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그는 “군사정부에서 일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국 이후 인공지능(AI)이 사람 일자리를 대체한다는 두려움도 큽니다.
“너무 그래도 안 됩니다. 바둑 수를 계산하는 건 알파고가 잘할 수밖에 없어요. 인공지능이라고 하지만 지능은 없어요. 지능이라고 하는 건 내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나라를 어떻게 해야 되느냐에 대한 구상을 하고 전략을 세우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유럽과 일본의 마이너스 금리 실험을 묻자, 영국의 경제 전문지 파이낸셜타임스를 들어 보이며 “엔고로 일본이 고생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지 않느냐”며 “마이너스 금리는 말이 안 된다. 힘들더라도 순리대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4대 개혁, 껍데기만 긁다 끝날 수도”
“대체로 정부가 하려고 하는 걸 이해할 수는 있지만 지금처럼 해선 껍데기만 조금씩 긁어놓는 것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노사관계만 해도 노사정위원회에 모든 걸 맡겨서는 잘 안 됩니다. 기업에는 ‘근로자를 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근로자들에게는 ‘기업을 돕는 것이 내가 사는 길이다’는 것을 일깨워 줘야 합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정신없이 노사 합의가 안 돼요. 그걸 제일 잘 아는 나라가 독일입니다. 거긴 절대 무리한 임금 인상을 요구하지 않아요. 기업들은 근로자를 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교육 개혁은 어떻습니까.
“대학수학능력시험은 하루빨리 폐지하고 학생 선발을 학교에 맡겨야 합니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이 학생을 지방별로 쿼터 만들어 모집하면 참 좋겠습니다. 미국 대학이 그렇습니다. 왜 그런 걸 못 배우는지…. 그러니까 ‘판박이 학생’만 나오고 엘리트를 못 길러요. 시험 잘 친다고 엘리트가 됩니까.”
그는 “자신만의 인생관, 자신의 특성을 잘 개발할 줄 알고 ‘나대로 산다’는 청년 정신이 있는 사람이 엘리트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현 정부의 정책 중 잘한 것은 무엇입니까.
“국사교과서 정부 편찬, 난 사실 반대입니다. 그렇지만 응급조치로서는 그것밖에 없어요. 불가피한 조치라고 봅니다. 다만 나중에 민간에 (권한을) 돌려준다고 해야 합니다. 많은 학생들이 남한이 북한을 먼저 쳐들어 왔다고 믿고 있다고 하거든요. 말이 됩니까. 그런 건 없어야 돼요.”
―가장 잘못한 정책은 무엇인가요.
“잘못했다는 건 아니고요.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결여돼 경제 정책에 있어서는 기대한 성과를 못 거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의 노력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효과가 없어요. 재정의 팽창이나 금융 완화, 부동산 거래 활성화, 경기 부양을 위한 규제 완화만 갖고는 안 됩니다.”
―정부가 어떤 일을 해야 하나요.
“오래 쌓인 결과여서 즉효약이 없습니다. 약 한두 첩으로 딱 낫는 건 없어요. 그래서 어려운 겁니다. 성장에 대한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앞으로 세상이 이렇게 될 테니, 이런 식으로 가야 한다는 걸 위정자가 알고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대통령 임기를 넘어가는 비전이 필요합니다. ‘대통령 끝나면 그만이지’라는 건 안 됩니다. 새로운 발상을 해야 돼요.”
―규제개혁과 공공부문 개혁은 어떻게 추진해야 하나요.
“규제를 무조건 없앨 게 아니라 왜 하느냐를 먼저 생각해야 해요. 수도권 규제와 같은 것은 정부가 무조건 안 된다고 할 게 아니라 왜 필요한가를 따져서 해야 합니다. 어떻게 일일이 검토하느냐고요? 그래서 정치가 어려운 거고, 국가 경영이 어려운 겁니다. 그냥 선 긋듯이 하면 누가 못하나요.”
그는 “부총리는 비슷한 부처의 이해가 상충될 때 이를 조절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별로 그런 것 같지 않다”며 “새로운 정책은 없이 부처 간판만 바꿔 다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지적했다.
―1995년 민선 1기 서울시장으로 정계에 입문했습니다. 20여 년간 한국 정치는 많이 변했습니까.
“이대로는 곤란합니다. 아무것도 안 될 겁니다. 우리 정치는 책임을 안 지는 제도를 갖고 있어요. 대통령제라는 게 그렇습니다. 잘될 때는 다들 그냥 넘어가요. 잘 안 될 때 문제가 생깁니다. 대통령이 책임을 안 지려면 ‘아이, 내가 하려고 했는데 정치에서 말을 안 들어’, 정당은 ‘왜 우리 책임이냐, 대통령이 해야지’ 그런단 말이에요. 그래서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The buck stops here(책임은 내가 진다)’라고 말한 겁니다. 영국 독일처럼 내각제를 하라고 하고 싶지만 개헌 얘기도 나오지 않고…. 우리는 완전히 프레시한 발상을 안 합니다.”
“책임정치 위해 내각제로 개헌해야”
―2000년대 초에는 ‘정당이 총재(현 당대표) 1인 지배 체제하에서는 내각제 어렵다’고 하셨는데요.
“1인 지배 체제하에서는 내각제라는 게 있을 수가 없지요. 내각제라고 하는 건 책임 소재가 분명합니다. 모든 책임은 총리가 지기 때문에 내 탓 네 탓 할 게 없어요. 항상 다수당이 지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너지면 총리가 사임하는 겁니다.”
―‘경제민주화는 표현상 모순이다’라고 발언한 적도 있습니다.
“정치민주화가 안되기 때문에 경제민주화라는 얘기가 나온 겁니다. 양극화 등이 왜 생겼나요. 그건 정치의 실패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경제에 민주화라는 말이 없지 않나요. 소득 분배, 균형화, 중소기업에 대한 ‘갑질’은 안 된다는 김종인 씨(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의 말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박용 기자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