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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박정훈]‘삼류들의 전쟁’ 美 대선

입력 | 2016-04-25 03:00:00


박정훈 워싱턴 특파원

투표는 민주주의의 꽃이라지만 실상은 추잡하다. 탐탁지 않은 물건을 강매당하니 후회가 뒤따른다. 판매대에는 어떤 이유인지 성한 물건이 없다. 한 지인은 지난 대선 때 ‘박근혜 문재인 다 싫다’며 지방으로 떠났다가 ‘문재인 당선 가능’ 메시지에 놀라 마감 직전 투표했다. 요즘 그의 심정은 어떨까. “손가락 자르고 싶다”는 말이 사라지지 않는 건 손가락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하는 게 바로 ‘꽃’이라는 투표다.

민주주의 수준이 높다는 미국 대선도 그렇다. 그 흔한 ‘위대한 선택’이라는 말도 들리지 않는다. 워싱턴의 한 싱크탱크 관계자는 “‘오바마 아류’ 힐러리 클린턴과 ‘막 자란 10대’ 도널드 트럼프가 판치는 선거”라며 혀를 찼다. 더 나은 후보조차 없는 ‘삼류들의 전쟁’이라는 거였다. ‘그 나물에 그 밥’ ‘도토리 키 재기’의 영어 표현이 있었다면 다 늘어놓을 터였다.

공화당 선두인 트럼프의 호감도는 24%(17일 NBC방송 발표). 여야를 통틀어 꼴찌였다.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결합체”(전·현직 멕시코 대통령) “초등학교 6학년 수준의 문법 실력”(카네기멜런대 언어기술연구소)이라는 조롱을 받는 것치곤 나쁘지 않다는 촌평까지 버젓이 TV 전파를 탄다.

3조 원짜리 트럼프타워에 근사한 캠프도 차리고, 이름난 전략가들을 영입한다고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다. 피를 나눈 동맹과, 공생해 온 이웃까지 몰라보는 트럼프에게 대선은 잃으면 그만인 카지노 판이나 다를 게 없다.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는 “트럼프의 말은 실행 불가능하며 고립된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에 호소하는 슬로건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비난 여론을 의식한 트럼프도 최근 “대통령다운 언행”을 약속했지만 칠순에 ‘막말 DNA’를 지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힐러리라고 나을 게 없다. 그의 호감도도 32%였다. ‘도긴 개긴’이란 말이 이 대목에 어울린다. 국무장관 시절 사설 e메일로 기밀을 다룬 게 불신의 이유라지만 근본 문제는 새 비전이 없다는 점이다. 테크노크라트가 중심이 되는 강한 정부를 통해 인종 간 평등을 실현하겠다는 그에게는 ‘짝퉁 오바마’라는 비판이 따라다닌다. ‘강자의 입장에서 약자를 편드는 척하는 욕심쟁이 할머니’ 이미지. 그게 힐러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

그런데도 질주는 계속되고 있다. 힐러리는 지난주 뉴욕 주 경선 대승으로 사실상 후보 지명만 남겨뒀다. 트럼프를 끌어내리는 것 역시 공화당 지도부의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 돼 가고 있다.

모든 게 ‘성한 물건’이 없는 탓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호감도 50%를 넘는 후보가 없을 정도다. 과거에도 그랬을까. 2008년 버락 오바마 후보와 2000년 조지 W 부시 후보의 선거 7∼8개월 전 호감도는 각각 62%, 63%였다.

국민이 좋아하지도 않고, 신뢰하지도 않는 인물이 대통령이 돼 간다는 건 병들어 가고 있는 미국의 단면이다. 불평과 불만이 이성과 지성을 짓누르고 있다는 증거다. 누가 대통령이 돼도 다수의 환영을 받지 못할 처지다.

한국 대선도 1년 8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역시 고만고만한 인물뿐이다. 편 가르기에 발목이 잡혀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다고 신세한탄만 하고 있을 순 없다. 저울에 달아보고, 회초리로 때려보고, 머리도 쓰다듬어서 쓸 만한 지도자로 키워야 한다. 투표를 꽃으로 만드는 건 우리 몫이다.

 
박정훈 워싱턴 특파원 sunshad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