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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한기흥]평양의 셰익스피어

입력 | 2016-04-25 03:00:00


줄리엣의 첫사랑은 로미오다. 로미오의 첫사랑은? 줄리엣을 만나기 전 로미오는 로절린과의 실연으로 괴로워했다. 그는 “만물을 보는 태양도 천지창조 이래 그런 미인을 못 봤을 것”이라고 했지만 줄리엣을 처음 본 순간 “내 가슴이 이제껏 사랑을 하고 있었나”라며 태도가 싹 바뀐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지고지순한 로맨스의 주인공을 ‘순도 100%’의 순정남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현실적이다.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이란 그 모양이다.

▷평양에서도 셰익스피어를 공부한다는 이야기를 김일성대 영문과 출신 탈북자로부터 들었다. 작품당 몇 쪽씩, 사상성이 없는 부분을 발췌해 학습했다고 한다. ‘베니스의 상인’에서 ‘살은 베어가되 피는 한 방울도 흘려선 안 된다’고 한 재판관의 기지 넘치는 판결 이야기는 북의 중학 국어 교과서에도 나온다. 셰익스피어에 대해 ‘위대한 사실주의자이며 인민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인 작가’라고 평가한 북한의 문학개론서도 있다.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이었던 23일 각종 기념행사가 지구촌 곳곳에서 열렸다. 요즘 흔히 쓰는 ‘컨트롤(control)’, ‘패셔너블(fashionable)’, ‘힌트(hint)’ 등은 셰익스피어가 만든 조어 2000개의 일부다. ‘반짝이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다(All that glitters is not gold)’와 같은 격언도 그의 작품에서 비롯됐다. 그런 단어와 표현을 지칭하는 ‘셰익스피어리즘(Shakespeareism)’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일상 속에서도 셰익스피어의 자취는 뚜렷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배신당한 뒤 “브루투스 너마저도”라고 절규했고 브루투스는 “카이사르를 덜 사랑한 것이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강변했다는 것도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나오는 상상의 산물이다.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문학적 비유와 표현은 어느 시대에서나 정치 사회 현상을 묘사하는 데 즐겨 차용됐다. 이번 총선 결과를 놓고 카이사르와 브루투스의 대사를 인용하며 입장을 합리화하는 정치인들도 많을 것이다.
 
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