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김원길 바이네르 사장
김원길 바이네르 사장이 컴포트화 신제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김상철 전문기자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를 마친 뒤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취업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그때 충남 서산에서 구둣방을 운영하던 작은아버지가 돈벌이도 괜찮다며 제화 기술을 권했다.
“해보겠습니다.”
서산 구둣방에서 10개월간 일한 뒤 더 큰 곳에서 배우기로 작정했다. 결심하면 바로 행동에 옮기는 그는 옷가방 하나 달랑 들고 상경했다. 영등포역 부근 구둣방 6곳에 일자리를 알아봤으나 거푸 퇴짜를 맞았다. 번화가를 벗어난 곳에 있던 양화점 주인이 월급 없이 숙식만 제공하는 조건으로 채용했다.
여름 비수기에 일거리가 없어 설악산 인근 산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피서철이 끝난 뒤 돌아와 참스제화에 수습공으로 들어갔다. 연탄가스를 마시고도 출근할 만큼 열심히 일해 1년 만에 기술자로 승격했다. 구두를 납품받던 케리부룩이 1983년 스카우트를 제의해 옮겼다.
“제가 출전하겠습니다.”
1984년 전국기능경기대회에 경기도 대표로 나갈 예정이던 기술자가 중압감을 못 이겨 잠적했다. 케리부룩에서 여성화 최고 기술자로 꼽히던 그는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해 대타를 자원했다. 공장장은 꼭 금메달을 따야 한다며 허락했다. 여성화가 아닌 남성화 제작이 경연 과제여서 70일간 연습한 뒤 참가했다. 결과는 동메달. 금메달을 따면 펼치려던 홍보 계획이 백지화돼 회사 분위기가 무거웠다. 휴가를 내고 무작정 부산으로 떠났다.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태종대에 갔더니 기암절벽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과 파도가 얼마나 오랫동안 다듬었을까.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단기간 준비해 금메달을 못 땄다고 신세 한탄이나 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겸손해야 하고, 실패했다고 좌절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1억 원어치 팔면 돼.”
백화점 측에 떼를 부려 말미를 한 달 얻었다. 회사와 상의해 5만∼6만 원짜리 구두를 2만5000원에 파는 특가세일에 나섰다. 인천 시내 곳곳에 현수막을 내걸고 전단도 돌렸다. 절박한 마음에 백화점에서 호객 행위까지 해 1억 원 넘는 매출을 올렸다. 콧대 높던 서울지역 백화점 2곳도 뚫어 재고를 다 처분했다. 회사에 오니 구두 판 돈을 챙겼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억울하고 섭섭해 8년간 일한 회사를 그만뒀다.
1990년 사장이 챙겨준 특별퇴직금 200만 원으로 구두 부속물을 만드는 회사를 차렸다. 당시 29세였다. 김원길 바이네르 대표이사 사장(55) 얘기다.
초기에는 신생 회사라 얕보고 물품대금을 제때 안 주는 거래처가 많아 자금난에 시달렸다. 1991년 우연히 케리부룩 실적이 형편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재고를 팔아주다 구두를 만들어 케리부룩 상표를 붙여 판매했다. 케리부룩의 부도로 구두가 안 팔려 큰 손해를 봤다.
김 사장은 가난의 아픔을 알기에 불우이웃을 돕는 데 매년 10억 원가량을 내놓고, 창업을 원하는 청년들도 돕고 있다. 맨손으로 연매출 500억 원대 중견기업을 일군 그는 바이네르를 세계 최고 구두회사로 만들기 위해 지금도 구두 굽이 닳도록 뛰고 있다.
김상철 전문기자 sckim0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