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다. 어디서 떨어뜨렸지? 그런데 공항 직원은 우리 집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부랴부랴 온 길을 되짚어 공항에 다녀온 딸이 현관문을 들어서며 내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역시 우리 엄마는 모범생!”
어떻게 연락처를 알고 득달같이 전화가 걸려 왔는지 궁금했던 우리의 의문이 풀렸다. 여권의 맨 뒤에 주소와 연락처를 착실하게 적어 놓은 덕분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나의 필체였다. 언제 썼는지 나도 기억조차 없지만 딸이 무심하게 빈칸으로 놔둔 것을 내가 대신하여 꼬박꼬박 채워 놓은 것이다. 이런 성격인 나를 ‘범생이 엄마’라고 은근히 놀리던 딸이 이번에는 진지한 표정으로 “원칙대로 사는 게 오히려 편한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원칙대로 연락처를 적는 간단한 일을 하지 않았다면 중국 거주비자를 다시 신청하는 까다로운 절차를 감내해야 했을 것이다.
“안 돼요, 할머니. 순서대로 해야 해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할머니는 딱히 누구랄 것 없이 붐비는 사람들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양해를 구했지만 사실 누가 선뜻 나서서 “먼저 하세요”라고 말할 권한은 없었다. 그래서 모두 마음이 불편한 가운데 아이는 계속 칭얼거리고 할머니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이때 한 사람이 나섰다.
“할머니랑 아이를 먼저 들어가게 하면 안 될까요?” 원칙주의자인 나도 반가웠다. 다행히 반대하는 사람이 없어서 할머니는 아이와 함께 촬영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어때, 이런 때는 원칙을 넘어서는 것도 좋은 일이지?” 딸의 귀에 대고 속삭이자 딸도 빙그레 웃으며 동의했다. 살아가면서 원칙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원칙을 넘어서는 것도 아름답다. 사람이 먼저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