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위대한 소원’에서 루게릭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고환(류덕환)이 친구들에게 “죽기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섹스해 보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이승재 기자
아, 이 영화에 등장하는 대사들은 흡사 데리다의 철학책을 읽는 것처럼 머리 아픈 수준이다. “무고한 사람을 희생시키면서 얻은 승리는 승리가 아니야” 정도는 초급 수준. “관대함과 죄책감은 서로 관계가 많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내 공포심뿐이야” 같은 중급을 넘어 “우리(슈퍼 히어로)의 힘은 새로운 도전을 불러일으키고, 도전은 충돌을 부르지. 그리고 그 충돌은 곧 재앙이 되는 거야. 즉, 우리는 재앙의 원인과 결과가 될 수 있는 거야” 같은 최고급 수준의 대사에 이르면 거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물아일체 경지에 이르게 된다.
게다가 이 영화를 관통하는 것은 ‘사적 복수심은 내 영혼을 잠식할 뿐’이라는 메시지이니, 이를 어찌 애들이나 보는 영화라고 치부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이는 아마도 슈퍼 히어로라는 비현실적 존재들의 이야기가 우리 현실과 접점을 갖도록 정당성을 부여하는 과정에서 동원되는 장치일 것이다. 심지어 ‘뽀로로 극장판 컴퓨터 왕국 대모험’에서 게임 속 세상으로 빨려 들어간 뽀로로가 가상세계를 탈출하는 모험담에선 철학자 보드리야르의 시뮐라시옹 이론이 묻어나지 않는가.
이런 뜻에서 ‘위대함’이라는 성스러운 가치는 어쩌면 매우 사적인 연유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얼마 전 국산 영화 ‘위대한 소원’을 보고 나서, 이런 저질스러운 영화가 ‘15세 이상’ 관람 등급을 받았다는 사실에 놀라는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묘한 진정성과 설득력이 느껴졌다는 사실에 또한 놀랐다.
영국 영화 ‘내 친구의 소원’(2011년)과 설정이 요모조모 흡사한 이 코미디 영화는 루게릭병으로 죽어가는, 그 이름도 야릇한 고교생 고환(류덕환)이 “죽기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섹스해 보고 싶다”는 소원을 친구 갑덕(안재홍)과 남준(김동영)에게 털어놓으면서 시작한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고교생의 마지막 소원이 고작 섹스? 그런데, 친구들 앞에서 울부짖는 고환의 고백이 묘하게 심금을 울린다.
“몸을 움직일 수도 없는데, 자고 나면 몽정을 해. (팬티를 갈아입혀 주는) 엄마가 볼까 봐 쪽팔려서 그럴 땐 그냥 오줌을 싸버려. 그럼 엄마가 이젠 오줌도 못 가리는 줄 알고 불쌍하게 나를 쳐다봐. 죽는 건 안 무서운데, 쪽팔려. 꼬꼬마 어린애로 죽는 것 같잖아. 죽더라도 어른으로 죽고 싶어. 나 섹스할 거야. 섹스하고 죽을래. 섹스! 섹스! 섹스! 섹스!”
친구들은 고환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여학생 일진들을 찾아가 “재능기부 한 번 해달라”고 했다가 뺨을 흠씬 얻어맞지만, 결국 이런 웃지 못할 사정을 듣게 된 고환의 아버지가 직업여성을 ‘섭외’하면서 아들의 소원은 어렵사리 이뤄진다. 옴짝달싹 못하는 고환이 병원 침대에서 소원을 성취하는 동안 밖에서 고환의 아버지와 함께 쪼그리고 앉아 기다리는 친구는 이런 명대사를 읊조린다. “내 친구는 섹스를 하고, 난 친구의 아버지와 기다린다. 불편하다. 미쳐버릴 것만 같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