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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신원건]습관에 도전한 디지털

입력 | 2016-04-28 03:00:00


신원건 사진부 차장

청바지 오른쪽 앞주머니 위엔 작은 주머니가 있다. 100여 년 전 청바지가 처음 만들어진 시절 귀중품이던 회중시계를 넣기 위한 것인데 손목시계가 대중화된 이후에도 남아있다. 회중시계에 연결하는 금속 체인도 여전히 청바지 패션의 상징이다.

스마트폰 통화 화면의 번호 순서는 왼쪽 위부터 ‘1, 2, 3…0’이다. ‘0’이 맨 아래인 것은 옛날 전화기 다이얼 순서를 따라서다. 이 때문에 ‘010’을 누르려면 손가락이 널뛰기를 해야 해 불편하다. 반면 계산기 앱의 숫자판은 옛 전자계산기를 따라 숫자가 배열돼 스마트폰 화면과 또 다르다.

걸출한 소비재가 등장해 시장을 선점하면 이용자들도 이에 익숙해진다. 습관의 힘은 크다. 이른바 ‘선점 효과’는 습관을 장악한다. 습관이 고착되고 나면 설령 비효율적이라도 바꾸기 어려워진다.

카메라도 그렇다. 요즘 디카(디지털카메라)의 원형은 ‘라이카’라고 할 수 있다. 1910년대부터 이 독일 카메라는 몸체를 가로로 길게 하고 가운데에 렌즈를 뒀다. 필름 때문이었다. 필름통 자리, 찍힌 필름을 감아 두는 공간이 있어야 했다. 이 디자인은 10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디카는 필름이 필요 없으니 ‘ㄱ’자, 원통 모양 등 다양하고 작은 디자인도 개발됐지만 이내 시들었다. 아직도 전문가용 고화질 디카는 1990년대 초반 필름카메라 외형 그대로이고 오히려 더 무겁기까지 하다. 소형 디카는 아날로그 향수를 자극하기도 한다. 무음도 가능한데 일부러 ‘찰칵’ 효과음을 넣는다. 디카 시장에도 이렇게 ‘습관의 힘’은 강력하다.

여기에 미국 광학기업 라이트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고화질인데도 기존 디카와 전혀 다르게 생긴 물건을 선보인 것이다. 지난해 말 나온 ‘L16’은 카메라라기보다 스마트폰 같다. 운영체제(OS)가 안드로이드이니 스마트폰을 쓰는 느낌이다. 그런데 화소 수가 무려 5200만이다. 웬만한 전문가용 디카보다 많다. ‘고화소 디카는 렌즈와 몸체가 크다’는 관념을 깬다. 어떻게 가능할까.

비결은 소형 카메라 모듈(폰카)들의 ‘결합력’이다. 각기 다른 폰카 16개가 한 면에 촘촘히 깔린 모양새를 하고 있는데 사진을 찍을 땐 이 중 10개가 작동한다. 동시 촬영된 10장을 최적의 사진 한 장으로 합성하는 방식이다. 화질이 떨어지는 폰카의 약점을 ‘벌 떼 작전’으로 극복한 것이다. 대형 렌즈나 이미지센서처럼 개인기 뛰어난 스타는 없지만 폰카들이 팀워크를 이뤄 고해상도 사진을 만든다. 구동 방식도 기존 디카와 다르다. 공동창업자 라지브 라로이아는 “크고 불편한 고성능 디카를 옷 주머니에 넣고 싶었다”고 개발 배경을 설명한다.

이 디카가 새로운 ‘100년 원형’이 될지는 아직 모른다. ‘익숙한 것에 익숙한’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존의 틀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폰카는 디카 시장의 액세서리로 탄생했지만 언제라도 꼬리가 몸통을 흔들 수 있는 게 디지털 세상이다.

신원건 사진부 차장 laput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