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원 산업부 차장
그때는 기술과 경험이 있는 근로자라면 나이에 상관없이 고용할 때였다. 몇 년째 세계 1위를 지키던 한국 조선업에 일감이 넘쳤다. 세계 도처에서 몰려드는 주문 물량을 감당하기엔, 일본은 이미 힘이 빠졌고 중국은 아직 힘에 부쳤다. 한국만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이런 좋은 시절은 당분간 다시 오지 않을 듯싶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올해 1분기(1∼3월) 울산 지역 실업급여 신청자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8.2%가 늘었다. ‘제조업 중심’이라는 울산의 현주소다.
정부와 금융권(채권단)이 조선업 몰락을 방치한 책임도 크다. 산업연구원은 2009년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한국 주력산업의 구조조정 방향과 정책과제’라는 보고서를 펴냈다. 산업 체질 개선과 경쟁력 강화를 위해 업종별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보고서다. 상시적 구조조정을 위한 제도 개선도 제안했다. 조선업도 구조조정 대상에 포함됐다. 하지만 금융위기 후 급성장한 중국 경제의 후방 효과로 한국 경제의 어려움이 예상보다 빠르게 회복된 것이 오히려 독이 됐다. 정부는 구조조정의 칼을 빼들지 못했고, 기회는 그렇게 한 차례 지나갔다.
물론 가장 큰 책임은 조선업의 ‘내부자들’에 있다. 원가가 얼마가 들어갈지도 모른 채 해양플랜트 등의 저가 수주 경쟁을 벌였던 ‘빅 3’ 조선업체(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가 그 중심에 있다. 김용환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는 한국 조선업의 위기 상황이 조선 산업과 많은 차이가 있는 해양플랜트 산업에 대한 기술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은 채 성급하게 뛰어든 데에서 기인한다고 진단했다.(동아비즈니스리뷰·2015년 12월 2호)
채권단 자금으로 연명하면서 부실을 감춰 성과를 부풀린 대우조선해양은 ‘죄질’이 특히 나쁘다. 대우조선 경영진은 재임 기간에 실적을 보여주기 위해 저가수주를 일삼았다. 분식회계 의혹도 있다. 그 와중에 정·관계와 군 출신 ‘낙하산’들이 고문, 상담역 등으로 이름을 걸고 제 몫을 챙겼다. 그런데도 산업은행과 채권단은 대우조선을 살리겠다며 막대한 규모의 자금을 쏟아 부었다. 현대중공업은 노동조합이 걸림돌이다. 회사가 9분기 연속 적자에 허덕일 때도 노조는 임금 인상과 해외연수 확대를 사측에 요구했다. 회사가 조선업 위기론을 부추긴다며 상경 투쟁을 할 정도다.
병든 부위를 도려내 목숨을 살리는 것이 구조조정의 취지라면, 팔다리가 썩어 가는데도 선뜻 메스를 들지 못한 정부나, 회사는 망해 가는데 제 이익만 챙긴 일부 기업 경영진과 노조의 행태는 직무유기 정도로 치부할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더 이상 ‘설마 우리를…’이나 ‘어떻게 이걸…’이라는 논리가 통하지 않을 궁지까지 몰렸다. 정부가 제대로 된 조선업 구조조정을 시행하려 한다면, 먼저 대마불사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설픈 칼질은 오히려 환자의 목숨을 더 위협할 뿐이다. 구조조정 이슈가 지속되는 한 ‘대마불사’와 ‘좋은 시절’은 공존할 수 없는 관계다.
주성원 산업부 차장 s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