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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대 메면 책임만 떠안아”… 구조조정 악역 꺼리는 관료들

입력 | 2016-05-04 03:00:00

[산업 대개조/구조조정의 적들]금융당국 “헐값 매각땐 책임론”… 우리은행 민영화 15년째 제자리
2012년 “대선 분위기 망친다” 머뭇… 구조조정 때놓친 STX, 회생 실패
정책자금 지원, 단기 실적에 집착… 좀비기업 정리는커녕 수명만 연장




《 “주력 계열사를 팔겠다고 해놓고 미적거리던 오너도 문제였지만 대통령 선거 분위기를 망칠까 봐 마냥 쉬쉬하고 있던 금융 당국도 책임이 있습니다.” 2012년 말 STX그룹 구조조정 과정에 참여한 한 채권은행 관계자의 얘기다. 당시 조선, 해운업 불황으로 경영난에 빠진 STX그룹은 STX팬오션을 시장에 팔기로 결정했지만 대선 국면에 접어들자 구조조정 작업은 사실상 중단됐다. 곧이어 ‘구조조정을 자제해 달라’는 박근혜 당시 대통령 당선인의 당부까지 나왔다. 금융 당국은 한 발 더 나아가 “국내 물류산업을 위해 STX팬오션을 살려야 한다”며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에 회사를 인수하라고 압박했다. 》
 

당국과 산은이 이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와중에 부채 비율이 2400%까지 높아진 STX팬오션은 2013년 6월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정권의 눈치만 살피고 자기 손에 피 묻히기 싫어하는 당국의 보신주의 때문에 구조조정 타이밍을 놓친 결과였다.

관료사회와 금융권에 뿌리박힌 보신주의는 선제적인 구조조정과 산업 재편을 가로막는 주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정부가 사회 전반의 고통 분담이 따르는 구조조정보다는 눈앞의 경기 활성화에만 주력하면서 ‘부실의 싹’을 잘라낼 기회를 놓쳤다는 분석도 나온다.

○ 몸 사리기 바쁜 관료와 금융권


정부가 총선, 대선 등 정치적 이슈를 의식해 특정 기업을 살려주거나 구조조정에 몸을 사리는 일은 오래전부터 반복돼 왔다. 이런 현상은 최근에도 되풀이됐다. 정부는 지난해 가을부터 한계기업을 퇴출시켜 구조조정에 속도를 내겠다고 했지만 4·13총선이 다가오자 사실상 구조조정 업무에서 손을 놓았다.

책임질 일을 하지 않으려는 공무원들의 태도 때문에 부실기업 정리를 진두지휘할 ‘소방수 관료’가 사라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금융 당국과 구조조정 업무를 오래해 온 채권단 관계자는 “구조조정 같은 주요 사안은 정부가 구두로 지시할 때가 많고, 관련 서류에 예전과 달리 정책 결정 책임자의 서명은 빠져 있다”고 말했다.

15년째 답보 상태인 우리은행의 민영화도 헐값 매각의 책임을 피하려는 관료 보신주의의 결과라는 분석이 많다. 정부가 오랫동안 거대 은행을 쥐고 인사와 예산에 개입하다 보니 기업 가치는 갈수록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현재 우리은행 주가는 시중은행 중 가장 낮은 1만 원 안팎을 오르내리고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과거 주가가 2만 원일 때는 가격이 오를 것으로 기대해 팔지 않고 지금은 자금을 회수하지 못한다며 안 팔고 있다”면서 “정부가 책임 회피를 하다가 매각 타이밍은 놓치고 기업 가치는 떨어뜨리고 있다”고 말했다.

보신주의의 적폐는 은행 등 금융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본인의 임기 중에는 부실채권 정리를 미뤄둔 채 성과 쌓기에만 주력하는 관리자들이 많다. 시중은행 지점장을 지낸 한 인사는 “새로 지점장이 되면 부실 대출 정리보다는 실적을 우선시하게 된다”며 “연간 실적을 좋게 하려고 12월에 쌓아야 할 대손충당금을 1월로 미뤄서 쌓는 경우가 흔하다”고 말했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는 “기업이 부실해지면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고 기피하기 때문에 은행 직원들 사이에 기업금융이 ‘3D 업종’이 됐다”며 “관료든, 금융회사 직원이든 ‘왜 내 임기 때 이 일을 해야 하느냐’는 생각으로는 구조조정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 단기부양 급급해 산업 재편 등한시한 정부


이처럼 정부와 금융권이 ‘몸 사리기’에 급급하면서 외환위기 이후 20년 가까이 한국의 구조조정 시스템은 작동을 멈췄고, 정권마다 ‘부실 폭탄 돌리기’는 반복됐다. 특히 글로벌 금융위기 때 정부가 위기 극복에 치중했던 나머지 최소한의 산업 구조조정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많다.

정부는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부터 4년 동안 경제 활성화를 위해 정책금융기관을 통해 시중에 정책자금 178조 원을 풀었다. 하지만 이는 시장에서 퇴출돼야 할 ‘좀비기업’들을 연명시키는 결과만 낳았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2009년에 약 20조 원의 정책자금을 지원받은 중소기업 2만5000개의 2년 뒤 현황을 분석한 결과 기업 생산성은 4.92% 떨어지고 기업의 생존 확률은 5.32%포인트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위기 이후 제대로 된 구조조정이 없다 보니 은행권에서는 부실채권이 쌓여 갔다. 2011년 1.36%였던 한국 은행권의 부실채권 비율은 지난해 1.71%로 치솟았다. 반면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나선 미국(4.29%→1.59%), 일본(2.40%→1.53%)은 이 비율이 대폭 떨어졌다.

정부가 구조조정 실행뿐 아니라 산업 대개조의 ‘큰 그림’을 그리는 일에 실패했다는 지적도 있다. 금융위기 이후 선진국들은 4차 산업혁명을 중심으로 한 제조업 르네상스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디지털 디자인과 3차원(3D) 프린팅에 집중한 미국의 ‘메이킹 인 아메리카’ 전략이나 제조업에 정보통신기술(ICT)을 접목한 독일의 ‘인터스트리 4.0’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한국은 선진국들처럼 일찌감치 신성장동력을 찾기는커녕 중국 등 신흥 제조업 강국들의 맹렬한 추격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오정근 건국대 특임교수는 “규제를 대폭 풀어야 신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데 기존의 낡은 틀을 갖고 추진하려니 혁신적인 산업 대개조가 안 된다”고 지적했다.

정임수 imsoo@donga.com·황성호 기자/ 세종=신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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