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표 기자의 문화재 이야기] 우리 문화재 속 페르시아
경주 괘릉을 지키는 무인석. 얼굴이나 옷차림으로 보아 이 무인은 서아시아 페르시아 계통이다.
우리는 삼국시대 때부터 페르시아와 교류를 했습니다. 천년고도 경주에 가면 곳곳에서 그 흔적을 만날 수 있답니다.
○ 신라왕을 지키고 있는 페르시아인
경주시 외동읍엔 통일신라 원성왕(785∼798년 재위)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괘릉(掛陵)이 있습니다. 이곳에 있던 작은 연못에 왕의 유해를 걸어 놓았다고 해서 괘릉이란 이름이 붙었지요. 봉분 앞에는 무인(武人) 조각상 한 쌍(각 높이 257cm)이 서 있습니다. 8척이 넘는 키에 육중한 몸집, 한 손은 불끈 쥐고 다른 한 손은 칼을 힘차게 움켜쥔 모습이 역동적이고 무시무시합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심상치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의 풍모가 아닙니다. 깊숙한 눈, 우뚝 솟은 매부리코, 귀밑에서 턱으로 흐르는 수염, 아랍식의 둥근 터번, 헐렁한 상의에 치마 같은 하의…. 전체적으로 서역인(西域人) 풍모입니다.
헌덕왕릉의 무인상(9세기), 흥덕왕릉의 무인상(9세기), 서악동 고분(8, 9세기)의 묘실 문 서역인상 등 경주에는 이 같은 서역인 조각이 꽤 많습니다.
○ 어떻게 서역인을 조각했을까?
통일신라 고분 모서리 기둥에 조각된 ‘폴로 스틱을 든 페르시아인’. 페르시아에서 들어온 폴로(격구)는 통일신라의 인기 스포츠였다.
○ 인기 스포츠 폴로를 즐기는 페르시아인
경주 괘릉 전경
9, 10세기 전후, 폴로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페르시아, 중국, 일본 등 실크로드의 전 구간에서 모두 인기였습니다. 중국에선 폴로를 즐기는 모습의 그림과 조각상이 다수 발견되었습니다. 특히 당나라 수도 장안(지금의 시안)에서는 여성들도 많이 즐겼습니다.
○ 경주에서 만나는 페르시아 문화
페르시아의 흔적은 또 있습니다.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에 전시 중인 문양석(8세기)을 볼까요? 여기엔 연주문(連珠文)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페르시아에서 발원해 경주로 들어온 겁니다. 연주문은 구슬을 원형으로 이어 붙인 모습의 문양을 말하지요.
황남대총, 천마총 등 경주 도심의 5, 6세기 대형 고분에서는 로마와 페르시아에서 제작한 유리 제품들이 발굴되었습니다. 당시 신라 사람들이 로마와 페르시아의 유리그릇을 수입해 사용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지요.
자, 한번 상상해 보세요. 통일신라시대 경주에서 페르시아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신라 사람들이 페르시아 사람들과 어울려 폴로를 즐기고, 로마와 페르시아에서 수입한 유리그릇을 사용하는 모습을. 당시 경주는 이렇게 개방적이고 글로벌한 도시였고, 우리와 이란의 교류는 무척이나 오래됐답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