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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하 전문기자의 休]황금빛 맥주에 캬∼ 700년 古都에 와∼

입력 | 2016-05-07 03:00:00

라거 맥주 탄생지 체코 플젠




▲8월 열리는 맥주축제 필스너 페스트. 뒤로 필스너 우르켈 양조장이 보인다.

《세상엔 다양한 맥주가 있지만 공법상으론 딱 두 가지다. 라거(Lager)와 에일(Ale)이다.

에일은 수천 년간 내려온 전통기법의 상온·상면(上面)발효 맥주. 반면 라거는 19세기 중반에서야 개발된 저온·하면(下面)발효 맥주다. 에일이 거칠고 탁한 데 반해 라거는 부드럽고 황금빛깔을 띤다. 라거는 혁명적인 맥주였고 세상을 매료시켰다.

그 라거에도 원조가 있다. 1842년 10월 5일 체코 플젠(Plzen)에서 탄생한 ‘필스너 우르켈’(독일어)이다. 이름 속에 ‘원조’(‘우르켈’은 영어로 ‘오리지널’)라는 말을 넣은 것은 유사 원조와 차별화하기 위해서다. 라거가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자 세계 각국에서 라거를 만들면서 저마다 필스, 필젠, 필센, 필스너 등등으로 원산지 냄새를 풍겼다. 필스너는 다른 제품과 차별화할 필요성을 느꼈고 1898년에 상표에 ‘우르켈’을 추가했다. 필스너는 지금도 ‘라거’의 대명사다.

필스너 우르켈은 오리지널의 품격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다른 브랜드처럼 세계 곳곳에 양조장을 두고 있지 않다. 지금도 라거가 탄생한 지하 8m에서 영상 6도를 유지하며 크림과 같이 부드럽고 풍부한 거품의 라거를 만들어 전 세계에 공급하고 있다. 》












필스너 우르켈의 트레이드마크.

1839년 어느 날. 주민 22만 명의 체코 플젠 중심가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시민들이 맥주통 36개를 들고 나와 시위를 벌였다. 성난 시민들은 맥주를 하수구에 쏟아부으며 외쳤다. ‘더 이상 이 곰팡내 나는 맥주는 마시지 않겠다’고. 소동의 원인은 점점 더 맛이 나빠지던 맥주였다. 시민들로부터 양조권을 위임받은 양조장 세 곳이 맥주를 만들고 있었는데 평판이 아주 나빴던 모양이다.

1295년 이 도시를 만들 때 왕은 250가구에만 양조권을 허가했다. 그 권리는 양조장별로 계승됐고 500여 년 후까지도 존재했다. 유난히도 맥주를 사랑했던 이곳 시민들은 직접 맥주를 만드는 대신 양조장이 만든 것을 마셔왔다. 따라서 그날의 시위는 일종의 ‘맥주혁명’이었다. 시민들은 대안을 제시했다. 기존의 양조권을 몰수하고 최첨단 ‘시민양조장’을 만들어 거기에 양조권을 넘겨주자고.

제안은 채택됐고 시민양조장을 만들기 시작됐다. 동시에 양조책임자인 맥주마스터도 물색했다. 그렇게 해서 초빙된 맥주마스터가 이웃한 독일 바바리아 지방의 한 양조장집 아들인 요제프 그롤(1813∼1887)이었다. 그롤은 아버지한테는 망나니 취급을 받았지만 맥주 양조에서만큼은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다. 마침내 기온이 낮은 알프스지방에서만 사용하던 라거 공법으로 이제까지 없던 투명하면서도 황금빛이 나는 맥주를 만들어냈다. 1842년 10월 5일의 일이다. 맥주광 플젠 시민도 감탄한 라거 맥주의 탄생이었다.

라거의 탄생은 플젠의 풍부한 자연에 그롤의 통찰력이 더해진 결과다. 네 개가 조화를 이룬 덕분이라고도 한다. ‘네 개의 조화’란 4개의 강이 교차하는 플젠의 지하대수층에서 나오는 부드러운 물(연수)과 이 지역의 두줄보리, ‘사츠(Saaz)’라는 세계 최고의 홉(Hop·맥주첨가물), 그리고 그롤이 창안한 ‘세 번 나누어 달이기’를 말한다. 세 번 나누어 달이기는 발아보리(몰트)의 전분을 알코올 발효를 위한 당분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물에 섞은 발아보리를 3분의 1씩 별도의 용기에 담아 제각각의 온도로 달인 뒤 시차를 두고 나머지와 섞는 공법이다. 필스너 우르켈의 매력적인 황금빛깔은 이렇게 온도를 달리해 그 온도에서만 활동하는 효소를 활용해 얻은 것이다.



필스너 우르켈 양조장 투어

▲필스너 우르켈의 ‘비어게이트’. 양조장 정문이다.

양조장은 구도심에서도 잘 보인다. 50m 높이의 굴뚝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문은 늘 열려 있다. 그 문은 독립문 형태로 신고전주의 양식의 돌문이다. ‘비어게이트(Beer Gate·1892년 건립)’라고 불리는데 필스너 우르켈의 상징이다. 독일어 상표에 찍힌 빨간 압인(壓印)에도 들어 있다. 양조장에 들어서면 여러 공장건물이 보인다. 높은 굴뚝의 왼쪽 건물이 필스너 우르켈 양조장이고 그 반대편이 자매 브랜드인 라거맥주 감브리누스(Gambrinus) 양조장이다. 감브리누스는 필스너 우르켈에 버금가는 체코 맥주로 필스너가 오래전에 합병했다.

한 시간 이상 걸리는 양조장 투어는 두줄보리와 사츠 홉, 플젠의 물을 소개하는 자료관에서 시작해 당화와 알코올발효 공장을 지나 지하 양조장에서 막을 내린다. 마지막 순서는 지하 8m 저장고에서 크림에 덮여 거대한 나무통에 담겨 있는 생맥주를 시음하는 것. 실내는 섭씨 6도로 한기를 느낄 만큼 춥다. 그 낡은 시설은 1842년에 만든 그대로다. 지하 양조장은 총길이가 9km에 이르는 통로 형태인데 거기엔 거대한 나무통만 수만 개가 놓여 있다.

지하에서 술을 빚는 이유는 저온발효공법 때문이다. 에어컨이 없던 시절에 섭씨 15도의 지하 온도를 6도로 낮춰준 건 얼음이었다. 한겨울 인근 호수에서 얼음을 잘라와 양조실 위층의 지하창고에 채워 두고는 환기구를 통해 냉기를 전달했다. 저온발효는 통상 일주일을 넘지 않는 에일 공법에 비해 시간이 세 배나 더 든다. 에일엔 없는 라거의 청량감과 깔끔함은 거기서 온다.



플젠에선 맥주가 물보다 싸다

플젠에서 목격한 인상적인 장면. 아침부터 담소하며 마시는 ‘모닝비어(Morning Beer)’다. 가기 전까진 설마 했다. 그런데 직접 보니 일상사였다. 세상에서 맥주를 가장 많이 마시는 나라(1인당). 독일? 영국? 아니다. 체코다. 일본의 기린맥주가 매년 조사하는데 체코는 부동의 1위로 지난해 기록은 156.9L. 다음이 아일랜드 독일 영국 호주 오스트리아 순이다. 체코는 맥주박물관도, 맥주양조 교과서도 최초로 만든 나라다. 미국 맥주 버드와이저 역시 여기 체코에서 태어났다.

그래서일까. 이곳에선 생수나 콜라보다 맥주가 싸다. 필스너 우르켈 양조장 안의 펍에선 0.5L 생수 한 병이 50코루나(1코루나는 49원)인데 같은 양의 맥주 한 잔은 28코루나였다.

체코에서도 가장 맛있는 필스너 우르켈을 마실 수 있는 곳은 따로 있다. ‘탱크 펍(Tank Pub)’이다. 탱크 펍이란 생맥주를 통상의 케그(Keg·20L짜리 철제 압력용기) 대신에 길이 1∼3m 대용량 구리탱크에 보관해 놓았다가 파는 술집. 그 탱크 펍 중에서도 추천할 곳은 병맥주는 내지 않는 ‘필스너 오리지널’이다. 필스너 우르켈 양조사가 직접 관리하는 식당으로 필스너 우르켈과 어울리는 체코 전통음식을 함께 낸다. 한국엔 아직 없다.



플젠의 구도심 둘러보기

플젠은 체코의 옛 지명인 보헤미아의 서부중심. 1295년 이 강변에 새 도시를 세운 건 4개의 강이 흘러드는 지리적 이점으로 유럽 대륙무역의 십자로가 됐기 때문. 플젠은 교역 발달에 힘입어 경제·문화적으로 융성했고 19세기 산업혁명기에 꽃을 피웠다. 시민양조장에서 출발한 필스너 우르켈(개업 1848년)과 당시 체코를 다스리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무기 공장 슈코다중공업(개업 1859년)이 융성했던 시절의 증거다.

하지만 이런 역사와 달리 구도심은 낭만주의시대인 19세기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13세기부터 300여 년간에 걸쳐 건설한 고딕 양식의 성 바르톨로메오 대성당과 주변을 에워싼 바로크 양식의 시청사(1559년 완공) 등의 아름다운 건축물, 그리고 리퍼블릭 사각광장(139×193m·13세기 조성)이 남아있는 덕분이다. 광장엔 플젠의 상징인 ‘물’을 쏟아내는 황금빛 분수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꼭대기에 성모마리아상이 있는 시청 앞의 높은 기둥은 1681년 전염병을 피해 온 체코 왕 루돌프 2세가 역병을 막아 달라는 염원을 담아 세운 것이다. 시청 옆 관광안내소가 들어있는 건물 ‘임페리얼 하우스’는 당시 왕의 거처였다.

플젠 관광에서는 맥주박물관과 ‘지하통로’도 빼놓을 수 없다. 세계 최초의 이 맥주박물관에선 플젠 시민의 맥주에 대한 열정과 19세기 플젠의 최첨단 양조과학을 두루 살필 수 있다. 13세기부터 파기 시작한 20km의 지하통로는 군사목적의 시설. 물레방아로 지하 전역에 물을 공급할 만큼 완벽한 피난시설인데 관광용으로는 1km만 공개하고 있다. 자동차 생산공장인 슈코다중공업의 ‘테크마니아 과학센터’는 어린이가 좋아할 만한 곳. 다양한 과학실험과 게임을 즐기는 인터랙티브 전시관인데 파이버글라스로 제작했던 세계 최초의 기관차(1963년)도 전시 중이다.

플젠(체코)에서

조성하 전문기자 summer@donga.com
 









▼여행정보▼



플젠: 수도 프라하에서 97km, 고속도로(D5)로 한 시간 거리. 프라하 중앙역에서 특급 기차로는 한 시간 반 소요. 북위 49도44분의 내륙(바다로부터 500km)이라 4월 하순도 영하 3도∼영상 18도. 필스너 페스트(맥주축제)가 열리는 8월은 13∼25도로 선선하다. www.visitpilsen.eu. 모바일 가이드는 앱 ‘City of Pilsen’.

맥주 관련: ◇필스너 우르켈 양조장: 플젠 시내에서 트롤리버스 10, 15번 탑승(15분 소요). http://pilsnerurquell.com ◇레스토랑(필스너 우르켈 오리지널) ▽유 살츠만(U Salzmannu): 1637년 개업한 플젠 최고(最古)의 펍 겸 펜션. 80석의 야외 맥주가든도 갖췄다. 2인 1박에 1650코루나. www.usalzmannu.com/en ▽유 만스펠다(U Mansfelda): 양조용 구리통 장식이 인상적이다.

맥주축제: ◇필스너 페스트(Pilsner Fest): 매년 8월 양조장에서 열린다. 라거 탄생일인 10월 5일이 너무 추워 8월에 연다. 음식과 맥주를 팔고 록 콘서트도 개최. ◇Sunce ve skle 2016: ‘글라스 인 스카이(Glass in sky)’로 번역하는데 플젠 교외(체르니체)의 농장에 자리 잡은 수제맥주 양조장 푸르크미스터를 중심으로 4, 5개 수제맥주 양조장이 주최한다. 올해는 9월 17일 열린다. www.slunceveskle.cz

맥주스파: 맥주 목욕은 16세기 바바리아 대공 빌헬름 4세도 즐겼다. 피부를 맑고 젊게 해주는 효험이 있다고 한다. 플젠 교외 체르니체의 수제맥주 양조장 푸르크미스터에서 체험할 수 있다. 맥주욕(40분)은 750코루나(약 3만6800원), 마사지를 포함한 스파 프로그램(70분)은 1150코루나(약 5만7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