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전통이 강한 서구 유럽의 대도시에서 최초의 무슬림 출신 시장이 나왔다.
5일 치러진 영국 지방선거에서 파키스탄계 이민자 가정 출신의 노동당 후보 사디크 칸(45)이 득표율 57%로 잭 골드스미스(41) 보수당 후보를 제치고 런던시장에 당선됐다. 칸 신임 시장은 7일 런던 서더크 대성당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런던 시민들이 두려움 대신 희망을, 분열이 아닌 통합을 선택한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서구 언론은 ‘유럽의 오바마’ ‘정치적 랜드 마크’라며 칸의 당선 소식을 전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난민과 테러 사태 이후 인종과 종교 갈등 및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 세력이 유럽 전역을 휩쓰는 상황에서 런던이 다문화와 톨레랑스(관용)의 얼굴을 보여준 역사적 선거”라고 평가했다.
칸 시장은 청소년 시절부터 신문 배달을 하고 여름철에는 공사장에서 일했다. 북런던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다가 정계에 입문했다. 2008년 노동당 고든 브라운 총리 시절 교통부 차관에 임명되면서 주목받았다. 영국 내각에 진출한 첫 무슬림이었다.
칸 시장은 취임 연설에서 “공영주택 단지에서 자란 내가 오늘 여기 있을 수 있는 비결은 이 도시가 우리 가족과 내게 베푼 기회와 도움 덕분”이라며 “도시가 내게 준 기회를 모든 시민들이 누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선거공약으로 지하철 기차 버스요금을 4년간 동결하고 서민들도 도심 외곽이 아닌 시내에서 살 수 있도록 저렴한 주택 공급을 늘리겠다고 했다.
칸의 당선을 놓고 유럽에서는 ‘이슬람의 유럽 점령’이 시작된 게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BBC에 따르면 런던시민 8명 중 1명은 무슬림이고 백인은 45%밖에 안 된다. 골드스미스는 선거운동을 하면서 칸과 이슬람 극단주의를 연결하려는 전술을 썼다. 칸 시장은 8일 일간 옵서버 기고문에서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이끄는 집권당이 지역공동체를 분열시키기 위해 도널드 트럼프의 전술에 나올 법한 술수를 썼다”고 맹비난했다. 독일 시사주간 슈피겔도 이날 칸의 당선에 대해 ‘이슬라모포비아’(이슬람공포증)에 대한 승리라고 평가했다.
힐러리 클린턴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빌 드 블라지오 뉴욕시장, 안 이달고 파리시장 등 세계의 유력 정치인들은 잇달아 당선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영국 노동당 소속의 이민자 가정 출신 정치인인 데이비드 라미 의원은 “영국에서 흑인이나 아시아계 총리가 탄생한다면 그건 칸 덕분”이라고 말했다.
파리=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