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데스크 진단]철밥통과 다이아몬드밥통

입력 | 2016-05-09 03:00:00


현대차 노조가 최근 임금 인상 요구안에 승진 거부권 조항을 넣어 논란이 일고 있다. 사진은 서울 서초구 양재동 현대차 본사. 동아일보DB

송진흡 산업부 차장

1990년대까지만 해도 승진을 원하지 않는 일선 세무서 하위직 공무원이 꽤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승진을 해서 국세청 본청이나 지방국세청에 가기보다는 연고가 있는 세무서에서 편하게 근무하는 것이 낫다고 봤다는 것이 개인적으로 친한 전직 국세청 고위 관료 A 씨의 설명이다.

그는 당시 일부 하위직 세무 공무원들 사이에서 현실 안주 분위기가 확산됐던 원인으로 ‘지역 담당제’를 꼽았다. 이 제도는 세무서 공무원별로 담당 지역을 정해 지속적으로 세원을 관리하는 것이다. 세금을 걷는 데는 효율적이었지만 비리가 생겨날 가능성이 높았다. 세금을 내는 사업자와 세금을 징수하는 세무 공무원이 서로 잘 아는 사이여서 뇌물이 오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A 씨는 “승진을 하면 이른바 ‘물 좋은’ 지역을 떠나야 하는 만큼 승진을 하지 않기 위해 은밀하게 로비를 하는 세무 공무원도 있었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국세청이 과세 자료 전산화를 마무리하고 지역 담당제를 폐지한 1999년부터 점차 사라졌다. 각종 징세 과정에 하위직 세무 공무원이 개입할 여지가 줄어들면서 일선 세무서에서 ‘붙박이 근무’를 고집하는 공무원이 확연히 감소한 것이다. 오히려 퇴직 후 받을 공무원연금을 생각해 가급적 빨리 승진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승진으로 월급이 오르면 나중에 받을 공무원연금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최근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현대차 노조)가 시계를 거꾸로 돌린 듯 하위직 세무 공무원들 사이에서도 ‘추억’이 된 ‘승진 거부’ 카드를 꺼냈다. 지난달 27일 열린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임금 인상 요구안을 확정하면서 별도 요구안에 ‘일반·연구직에 대한 승진 거부권 부여’ 조항을 넣은 것이다. 노조 측은 “일반·연구직 조합원 8000여 명 가운데 상당수가 승진하는 대신 노조원으로 남아 고용을 확실하게 보장받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하고 있어 이같이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현재 현대차에서는 일반직 대리가 과장이 되면 노조원 자격이 없어진다. 연구직은 연구원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승진하면 같은 절차를 밟게 된다. 노조원 자격을 잃는 과장이나 책임연구원이 되면 연봉제를 적용받고 인사고과에 따른 압박도 생긴다. 반면 생산직은 직급이 오르더라도 노조원 자격을 유지할 수 있다.

재계에서는 현대차 노조에서 나온 ‘승진 거부’ 움직임을 심각하게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승진을 목표로 한 치열한 내부 경쟁이 없어지면 ‘하향 평준화’로 회사 전체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다. 글로벌 경기 침체로 전 세계 자동차 업체들이 사활을 걸고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특히 제품 경쟁력을 좌우하는 연구개발(R&D) 분야에서 내부 경쟁이 없어지면 장기적인 성장에 치명타가 될 수 있다고 자동차 전문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경영권 침해를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승진 거부로 최고경영자(CEO)의 핵심 권한인 인사권이 무력화되면 필요한 인력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없어 정상적인 기업 활동이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다.

재계 일각에서는 승진 거부 논란으로 현대차 노사 관계가 한층 복잡해질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그동안 생산직에 비해 온건했던 연구직 노조원들까지 제 목소리 내기에 나선 것이 향후 노사 협상 타결에 새로운 변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차는 올해 1분기(1∼3월) 영업이익이 1조3424억 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15.5% 줄었다. 2011년 1분기 이후 5년 만에 분기 기준 최저치다. 같은 기간 국내외 판매량도 110만7377대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6.4% 감소했다. 해운이나 조선업체들처럼 당장 구조조정에 들어가야 할 상황은 아니지만 중국 시장 판매 부진 등 곳곳에서 ‘위기 신호’가 감지되고 있다. 한가롭게 승진 거부 논란으로 전력을 낭비할 때가 아니다.

“한때 일부 공무원이 승진을 하지 않으려고 로비를 하기도 했지만 현대차 노조처럼 대놓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흔히 공무원을 ‘철밥통’이라고 하지만 현대차 노조원은 ‘다이아몬드밥통’인 것 같네요.” 전직 국세청 고위 관료 A 씨가 웃으면서 한 얘기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송진흡 산업부 차장 jinhu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