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말 베이징서 돌연사한 와카미야 전 아사히신문 주필 한국선 ‘친한파’ 소리 들었지만… 일본선 ‘매국노’라는 비판까지 그래도 담담하게 소신을 지켰다… 그가 원했던 한일관계는 일방적인 승패가 아니라, 양보 배려로 모두가 이기는 것 언론인 와카미야의 일관성… 후배들이 이어갈 수 있을지
심규선 대기자
칼럼을 쓴 기자는 26년 전 나가노(長野)지국에서 근무할 때 미호 씨 부모의 결혼식도 취재한 적이 있었다. 슬픈 결혼식이라고 했다. 미호 씨의 아빠가 피차별부락 출신이어서 결혼을 극구 반대한 엄마 쪽 식구들이 한 명도 오지 않았기 때문. 피차별부락은 최하층 천민들이 살던 마을로(예전 우리나라의 백정마을 같은) 그곳 출신들은 결혼과 취업, 육아 등에서 심한 차별을 감내해야 했다. 기자는 당시 그런 풍토를 없애자는 캠페인 기사를 장기 연재 중이었다.
칼럼은 아픔을 겪은 부부가 힘은 들었지만 세 자녀를 당당하게 길렀고, 이번에는 축복 속에서 장녀의 결혼식을 올리게 된 감동적 스토리를 꼼꼼한 취재와 애정 어린 시각으로 전하고 있었다. 글쓴이는 정치부장이었다.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고 신문을 든 채 바로 찾아갔다. 그리고 “정말 감동했다”고 말했다. “같은 기자한테 칭찬을 들으니 쑥스럽다”고 웃던 그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고, 그 후 좋은 선후배로 지내 왔다. ‘그’는 지난달 28일 중국 베이징에서 한중일 심포지엄에 참석했다가 돌연사한 와카미야 요시부미(若宮啓文·68) 전 아사히신문 주필이다.
그는 한국에서 ‘친한파’라는 말을 듣는 대신 일본 우익들로부터는 내내 ‘매국노’라는 비난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는 양쪽 모두의 평가에 담담했다. 언론의 정도(正道)를 걸으려 노력했는데 결과적으로 한국에 우호적으로 비쳤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글은 예리했지만 ‘애정’도 포기하지 않았다. 한일관계에 실망한 적도 있지만 비아냥거린 적은 없다. 그만큼 오랫동안 한일 문제에 매달려 온 언론인도 드물다. 그는 1979년 한국 방문 이후 한일 문제를 평생 추구해야 할 ‘라이프 워크’로 삼았고 여러 권의 저술을 통해 초심을 입증했다.
나는 그가 늘 유머를 잃지 않고 새로운 글쓰기 형식을 고민했던 선배로 기억하고 싶다. 그는 한국에서 열린 어느 심포지엄에서 “독도에는 대나무가 없는데, 왜 일본은 다케시마(竹島)라고 부르느냐”는 힐난성 질문을 받자 “그럼 독도는 동도 서도 등 여러 섬으로 되어 있는데, 왜 독도라고 부르느냐”고 되물어 폭소가 터진 적이 있다. 2010년부터 동아일보에 연재한 그의 칼럼 ‘와카미야의 동경소고’ 66편에는 소설체나 대화체, 우화체 등 형식 파괴로 관심을 끈 글도 많다. 그는 글의 형식도 중시했던 로맨티시스트였다.
그가 베이징으로 떠나기 이틀 전 서울 북촌에 있는 어느 지인 부부의 한옥에서 저녁을 함께한 것이 마지막 만남이 됐다. 그 자리에서 지인 부부는 살림집 옆 별채를 그가 서울에 오면 머물 수 있도록 무료로 제공하겠다고 했다. 그는 부담스러워하면서도 고마워했다. 그때 별채에 이름을 붙이자는 얘기가 나왔다. 한일관계를 더 낫게 만드는 꿈을 꾸는 집이라는 뜻에서 ‘꿈 몽(夢)’과 ‘집 재(齋)’는 일찌감치 결정됐다. 그런데 ‘시작한다’는 뜻으로 계(啓)를 넣어 계몽재(啓夢齋)로 할지, 개(開)를 써서 개몽재(開夢齋)로 할지가 논쟁거리였다. 그는 자신의 이름 계(啓)가 들어간 계몽재도 싫지 않은 눈치였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계(啓)는 위가 아래를 가르친다는 권위주의적인 냄새가 난다며 개몽재로 결정해 버렸다.
와카미야 선배. 그 부부는 당신한테 했던 제안을 거두지 않고 다른 일본인 학자나 언론인에게도 그 별채를 오픈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별채 이름을 바꾸려 합니다. 계몽재로 말입니다. 왜냐고요? 그냥 그러고 싶네요. 이제 무거운 짐은 후학들에게 맡기고 편히 쉬소서….
심규선 대기자 kss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