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막말을 일삼는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기자는 요즘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한 치의 빛(an inch of daylight)도 들어올 틈이 없다”(존 케리 미 국무장관·2014년 1월)던 한미 관계는 트럼프 앞에서 주판알 튀기기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주한미군 주둔비를 더 내라더니 급기야 “100%는 왜 안 되느냐”(4일 CNN 인터뷰)며 집권하면 연 2조 원짜리 청구서를 들이밀 태세다. 광우병 파동까지 겪으며 어렵사리 체결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자신이 집권하면 어떤 식으로든 뜯어고치겠단다.
트럼프 폭주는 한미 관계를 새삼 되돌아보게 한다. 지금은 굳건한 한미 동맹을 유지하고 있다지만 부침도 없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를 거쳐 노무현 정부에선 종종 삐걱거렸다. 2008년 이명박 정부 때 복원됐지만 박근혜 정부 들어 ‘중국 경사론’을 워싱턴은 우려하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이 지난해 9월 중국 베이징 톈안먼 망루에 올라 열병식을 참관한 것은 상징적 장면이었다.
당시 미 정부 당국자들은 “한국이 중국과 가까워지는 게 미국으로서 나쁠 건 없다”고 태연해했지만 속으로는 부글부글했다. 중국의 부상을 견제해야 하는 미국으로선 한국과 일본의 협조가 절대적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중국과 역사 문제 등으로 대립하는 일본에 대해 고맙게 느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지난해 4월 오바마 대통령은 그런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미국을 국빈방문하자 만찬장에서 일본 단시(短詩)인 하이쿠(俳句)를 일본어로 읊조리며 사케로 건배를 하는 파격 예우를 했다.
지난 역사에서 보듯 미국은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우방이지만 미국이 소나무처럼 변치 않고 한국을 대할 것이라는 생각은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외교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다. 아직은 미국에 건전한 양식을 가진 세력이 있다지만 트럼프를 계기로 앞으로 미국인들 사이에선 한미 관계에 대해 이전에 없이 다양한 얘기가 오갈 것이다. 한미 동맹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으면 좋겠지만 트럼프의 거친 논리에 동조하는 이가 늘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미 동맹을 설명하는 복잡한 외교적 논리를 돈 문제로 뚝딱 단순화시키는 트럼프의 화술은 내용의 사실 여부를 떠나 많은 사람의 귀를 붙잡는다.
한국으로선 ‘트럼프는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욕하면 속은 시원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트럼프 태풍에 대처하는 방법일 수는 없다. 이럴 때일수록 의연하게, 필요하다면 ‘포커페이스’를 하고 트럼프 현상을 냉철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2016년 미국과 미국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할 계기로 삼는다면 이것은 트럼프가 의도치 않게 우리에게 준 ‘선물’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