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교장때 5·16지지 행진 거부… 군복 벗고 美유학뒤 1976년 귀국 학자-외교관으로 제2의 삶… 노태우정권 출범때 총리직 맡아 1990년 평양서 김일성 주석 만나… 남북정상회담 제안, 교류 물꼬
1990년 9월 4일 낮12시 5분경 남북고위급회담장겸 북측 대표단 숙소인 서울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강영훈 국무총리와 연형묵 북한 정무원 총리가 손을 들며 환하게 웃고 있다. 동아일보DB
1961년 5·16군사정변은 강 전 총리의 인생에 전환점이었다. 강 전 총리는 회고록 ‘나라를 사랑한 벽창우’에서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적었다.
육군사관학교 교장이던 고인은 군사혁명위원회에서 5·16 지지 시가행진에 육사 생도들을 동원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육군참모총장실로 달려가 장도영 총장, 박정희 소장을 만났다. 그는 “육사 생도를 정치도구로 이용하는 것은 민주정치의 기반을 확립한다는 군사혁명 구호에 어긋난다”며 동원령을 거부했다.
이후 한국외국어대 대학원장과 외교안보연구원장, 영국·아일랜드 대사 등을 역임하며 학자와 외교관으로 제2의 인생을 살게 된다. 1988년 당시 민정당 소속 전국구(현 비례대표)로 13대 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1988년 12월에는 당시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총리직 제안을 받는다. 고인은 “대통령을 도와 양심껏 최선을 다해 민족사회의 민주정치 발전에 기여하리라고 마음을 굳혔다”고 회고록에 썼다.
고인은 민주화 과도기의 총리로서 법치주의 확립을 제1 과제로 삼아 불법 시위에 엄격하게 대응했다. 회고록에서 “총리로서 십자가를 짊어져야만 했다”고 썼다. 한편으로는 18차례에 걸쳐 ‘국민과의 대화’를 갖는 등 소통에도 나섰다. 전형적 외유내강형인 고인을 당시 총리실 직원들은 ‘강(强)’총리, ‘공(公)’총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1990년 10월 2차 남북 고위급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을 때에는 김일성 주석을 만나 “먼저 (남북 간) 신뢰부터 구축해야 한다”며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하기도 했다.
2년여 동안 총리직을 수행하고 퇴직한 뒤엔 사회 원로로서 다양한 활동을 이어갔다. 6년간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재임하며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세종재단 이사장, 인촌상 운영위원회 위원장,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초대 회장 등을 지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고인의 빈소에 조화를 보내 애도했다.
유족은 부인 김효수 씨와 아들 성룡 효영 씨, 딸 혜연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 발인 14일 오전 7시. 장지는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제3묘역에 마련된다. 02-3010-2230
장택동 기자 will7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