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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칼럼]박 대통령의 “나를 밟고 가라”

입력 | 2016-05-11 03:00:00

이란에서 루사리 쓴 박 대통령… 국내선 ‘루사리’식 소통 못하나
성공한 대통령으로 남으려면 내 사람 키울 생각 버리고,
국회와 대결하지 말고, 오바마처럼 ‘입법 로비스트’ 되라




황호택 논설주간

총선 후 한 달이 돼가지만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꼭 들어야 할 이야기를 못 듣고 있다고 느끼는 국민이 많다. 총선 다음 날 청와대가 내놓은 반응은 달랑 두 줄짜리 대변인 논평이었다. 박 대통령은 총선 나흘 뒤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민의를 겸허히 받들어 국정의 최우선 순위를 민생에 두겠다. 정부도 새롭게 출범하는 국회와 긴밀하게 협력해 나가겠다”고 밝혔는데 대변인 논평에서 진전된 것이 없다.

지난달 26일 언론사 편집·보도국장 오찬간담회에서는 “집권당의 선거 패배는 궁극적으로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식에 대한 심판 아니냐”는 직선적인 질문이 나왔으나 박 대통령은 정치논평으로 답했다. “국민이 양당제에서 되는 것이 없으니 변화와 개혁을 한다는 생각에서 3당 체제를 만들어 준 것이라고 본다.” ‘양당 체제 심판’은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선거 기간 내내 반복한 선거 구호다. 박 대통령이 국민의당 대변인인가.

편집·보도국장을 45명이나 불러놓은 오찬 간담회에서는 돌아가며 한마디씩 하기도 바쁘다. 형식도 그렇지만 순서를 놓고 보더라도 국민과의 소통을 먼저 했어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0년 총선에서 제1당을 한나라당에 내주자 TV로 중계된 특별담화에서 “총선 민의는 여야 협력 속에서 안정을 이루라는 지엄한 명령”이라며 여야 영수회담을 제안했다.

미국에서도 한 정당이 10년 이상 집권하면 피로감이 쌓여 정권교체로 이어진 경우가 많다. 공화당에서 로널드 레이건, 조지 부시 대통령을 합쳐 12년을 한 뒤 민주당 빌 클린턴 대통령이 탄생했다. 그 다음은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8년, 다시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8년이다.

한국에서 진보정권 10년 정치를 심판한 결과가 이명박 정부의 탄생이었다. 이번 총선 결과를 보면 대선에서는 보수정권 10년을 심판하는 흐름이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이번 선거에서 정당 지지율을 보면 새누리 30%, 국민의당 25%, 더민주 24%, 정의당 8%다. 야권을 합하면 57%로 새누리의 배에 가깝다.

사실 더민주는 친노와 문재인이 뒤로 숨고 김종인을 내세워 간판만 바꾼 위장개업 정당이었다. 문재인 당이 과거에 이런 지지를 받은 적이 없다. 여당에 염증을 느껴 새누리당을 찍기 싫은 국민이 더민주의 위장술에 속아준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노무현 정부 말기에 한나라당은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대선 승리를 이끌었다. 지금 새누리당의 국정 성과를 따져 보면 진보 쪽에서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비판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현재 권력이 미래 권력을 창출하려는 시도는 정당정치에서 하등 잘못된 게 아니다. 그러나 퇴임 후 보호막 형성이나 영향력 행사를 위해 자기의 뿌리에서 나온 사람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을 역대 대통령들도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한구를 등장시킨 공천 실패도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나왔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 “내 사람을 키우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차라리 “나를 밟고 가라”는 결기를 보여준다면 분위기가 달라질 수도 있다.

박 대통령은 이란 방문 때 히잡의 일종인 루사리를 착용했다. 서구 일각에서는 히잡이 여권(女權)의 억압을 상징하는 패션이라는 시각도 있다. 프랑스에서는 공공교육시설에서 히잡 착용을 법으로 금지한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이란 지도자들과의 소통을 위해 과감히 루사리를 둘렀다. 국내에서 국회와 야당을 상대로 해서는 상대를 배려하는 루사리 식의 소통을 왜 못하는가.

박 대통령은 19대 국회에서는 설득과 소통의 노력은 별로 하지 않고 법을 통과시키지 않는 국회를 위협하듯 “국민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을 거듭 했다. 박 대통령이 선거 기간에 ‘국회 심판’을 자주 거론해 결과적으로 신진세력인 국민의당 선거운동을 해줬다는 말이 나오는 판이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총선 패배의 원인을 냉철하게 분석해 소통 대화 타협에 노력한다면 남은 1년 10개월 동안에 성공한 대통령으로 남을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총선 후 대통령에게 수많은 제언이 있었지만 나도 두 가지만 보태고 싶다. 첫째, 국회를 가르치고 혼내려 하지 말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처럼 ‘입법 로비스트’가 되라는 것이다. 둘째로 국가를 위한 길이라면 “나를 밟고 가라”는 진정성으로 정치권은 물론이고 국민과도 소통하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황호택 논설주간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