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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 기자가 만난 사람]“韓日, 아리랑과 엔카로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 됐으면”

입력 | 2016-05-16 03:00:00

성대 마비 딛고 엔카 앨범 내는 성악가 배재철




배재철은 ‘테너 중의 테너’인 파바로티 같은 성악가를 꿈꿨다. 그는 “고등학교를 다닐 때 집안 형편이 어려워 레슨도 많이 받지 못했다”며 “친구들이 생일선물로 사준 파바로티 음반을 닳도록 들으며 테크닉을 익혔다” 고 말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박용 기자

#1. “하아악교오 조옹이, 때앵때앵때애….’

2000년대 초반 이탈리아 독일 등 유럽 무대를 누비던 테너 배재철(47)의 오페라 공연 기록은 2005년 10월 이후 빈칸으로 남아 있다. 그해 독일에서 갑상샘 암 수술을 받고 오른쪽 성대
마비가 온 것이다. ‘하이 C’(기준 도인 C3보다 두 옥타브 높은 도인 C5를 말함)’를 넘나들며 오페라 일트로바토레의 만리코 역을 매끄럽게 소화하던 그의 성대는 동요 ‘학교 종이 땡땡땡’조차 부르지 못할 정도로 망가졌다.

#2.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 볼 때….”

그는 2006년 4월 부분 마취를 하고 일본 병원의 수술대 위에 누웠다. 성대 재건 수술을 집도한 이시키 노부히코 박사가 ‘성대 조율’을 위해 아무 노래나 해보라고 했을 때, 그는 어린 시절 성악의 길로 안내한 찬송가를 시작했다. 눈물과 함께 기적처럼 목소리가 나왔다.

#3. “술집에서 홀로 마시는 술은 이별의 눈물 맛….”

올해 3월 29일 저녁 일본 도쿄 참의원 의원회관 강당. 일본 국회의원과 보좌관 등 100여 명 앞에서 배재철이 무대에 올랐다. 그의 선곡은 일본의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의 엔카 ‘가나시이 사케’(슬픈 술). 구슬픈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가 시작되자, 객석은 ‘소리 반, 공기 반’의 몰입 상태로 빠져들었다. 배재철은 목소리를 잃고 다리를 얻은 인어공주처럼 새로운 노래인생을 얻었다. 얼어붙은 한일 관계는 한쪽이 마비돼 힘을 잃은 그의 성대처럼 불안하다. 그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노래로 두 나라 화해의 물꼬를 트기 위해 애쓰는 이유다. 11일 서울 성동구 금호동 ‘스튜디오 보이스 팩토리’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

“노래는 내 인생, 포기해 본 적 없어”
 
―일본 의원회관 무대에는 왜 섰나요.


“일본 참의원 중 한 분(나오시마 마사유키 의원)이 2014년 말 개봉한 한국영화 ‘더 테너 리리코 스핀토’를 보셨어요. 그분이 요청해서 영화 상영회가 열렸고, 영화의 실제 주인공인 저를 초대한 겁니다.”

영화 ‘더 테너…’는 일본인 매니저 와지마 도타로(53)와 일본 팬들의 도움으로 성대 재건 수술을 받고 재기한 배재철의 삶을 영화화한 것이다. 배우 유지태가 배재철을 연기했다. 비슷한 시기 개봉한 ‘국제시장’에 밀려 흥행하진 못했다.

―목 상태는 어떤가요.

“전성기의 절반 정도입니다. 오른쪽 성대는 못 써요. 일본에서 마비돼 축 늘어진 오른쪽 성대를 붙잡아 세워 고정시키는 수술을 받았어요. 왼쪽 성대와 부딪혀 소리를 내게 만든 겁니다. ‘하이 C’까지 고음을 부분적으로 낼 수 있어도 노래하듯 연속으로 내긴 어려워요. 오페라는 아직 무리고, 예술 가곡 등을 주로 부릅니다.”

예전의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 매일 연습하며 성대를 단련시키는 그는 스스로를 모루에 올려놓고 두드리는, 강철처럼 단단한 사람이었다.

―전성기에 노래를 할 수 없게 됐는데….

“독일 의사들이 ‘의학적으로 다시는 노래할 수 없다’고 했어요. 말이라도 할 수 있으면 행운이라고 하더군요. 노래를 그만둬야 하는 상황인데, 이상하게 포기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 말을 들으면서도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생각만 났습니다. 한 번도 포기를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려서 교회 성가대 활동을 하며 노래와 가까워졌습니다. 아버지는 버스를 운전하셨어요.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죠. 아버지에게 ‘성악을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말이 없던 아버지는 ‘그래, 네가 노래는 잘하지. 그 공부 했으면 좋겠다. 빚을 내서라도 보내주겠다’고 하더군요. 그 뒤 노래가 제 인생이 됐습니다. 그래서 더 포기할 수 없었던 것 같아요.”

그는 실기 수석으로 한양대 음대를 졸업하고 더 큰 꿈을 찾아 1994년 4월 이탈리아로 떠났다. 두 달 후 밀라노의 베르디 국립음악원에 합격했다. 아내 이윤희 씨(45)도 그곳에서 만나 1996년 결혼했다.

“외환위기 땐, 상금 받아 유학생활”

―이탈리아 유학 생활은 어땠나요.


“아버지는 정말로 빚을 내 이탈리아 유학까지 보내주셨어요. 처음에 한 달 70만 원으로 버티며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외환위기가 터졌죠. 처가도, 아버지도 학비를 보내줄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여행 가이드를 해봤지만, 여행사가 부도 나 한 푼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때 ‘내가 잘하는 것으로 버텨 보자’고 도전한 게 콩쿠르였습니다.”

그의 사무실 입구에는 1998년 1월 6일 독일에서 열린 ‘플라시도 도밍고 오페랄리아’ 국제콩쿠르 포스터가 붙어 있다. 그는 이 대회에서 우승해 상금 1만 달러를 타고 플라시도 도밍고와 함께 공연까지 했다. 그는 “상금을 타야 버틸 수 있는 절박한 상황”이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가족 같은 일본인 친구들도 많이 얻었는데….

“일본인 매니저의 믿음과 희생이 없었다면 재기할 수 없었겠죠. 일을 접자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인데, 오히려 제 손을 잡고 놓지 않더라고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대에 다시 세운다고. 저 또한 ‘그래 언젠가 서겠지’라고 생각했어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반드시 도움의 손이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는 2003년 일본 오페라 무대에 데뷔했다. 그를 캐스팅한 사람이 지금의 매니저인 와지마 씨다. 2년 만에 성대 마비로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지만, 매니저와 일본 팬들은 그를 기다려줬다. 성대 수술비 일부도 팬들이 댔다.

―일본인 의사와도 친분이 두텁다고 하는데….


“이시키 박사가 처음에는 ‘성악가를 수술한 적이 없다’며 수술을 망설이셨어요. 매니저가 제 음반과 공연 비디오를 보여주고 ‘꼭 이 사람을 다시 무대에 세워야 한다’며 간곡히 부탁하자 수락하셨대요. 77세의 고령인 데다 주위에서 ‘잘못되면 명성만 훼손된다’며 수술을 말렸다고 들었습니다. 그분은 2008년 도쿄에서 열린 재기 콘서트 이후 공연마다 빠지지 않고 오십니다.”

이 밖에 그는 후원자인 히노하라 시게아키 일본 성누가국제병원 이사장(104)과 공동 토크 콘서트도 일본에서 연다. 히노하라 이사장은 2013년 역경을 이겨낸 그의 노래를 듣고 감명을 받아 후원자가 됐다.

―전성기 때와 어떤 게 달라졌나요.


“목소리를 잃기 전에는 ‘한번 들어보라’며 자신 있게 불렀어요. 지금은 그렇게 멋있고 화려한 소리를 못 내요. 쉽게 불렀던 노래도 한 음 한 음 조심스럽게 불러야 합니다.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내면 감정을 120% 끄집어내려고 노력합니다. 관객들도 그걸 알죠. 공연하다가 소리가 안 나면 예전엔 ‘패닉’이 됐을 겁니다. 지금은 관객들이 격려해주고 함께 불러줘요. 서로 마음이 통하는 거죠.”

―성악가로서 롤 모델은 누군가요.

“어렸을 때는 이탈리아가 낳은 최고의 테너인 파바로티를 존경했어요. 목소리를 잃고는, 이런 말씀드리긴 죄송하지만, 밤무대 가수분도 부러웠어요. 노래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노래를 하는 모든 사람들이 존경스럽습니다.”

“음악으로 韓日관계 풀고 싶어”

―일본에 자주 가나요.

“한 달에 한 번 정도 갑니다. 일본에 데뷔할 때는 돈도 벌고, 얄미운 일본 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려고 했어요. 왜 그랬는지 부끄럽습니다. 이젠 내게 손을 내밀어준 친구들과 일본 팬들에게 노래로 보답해야죠. 친구처럼 형처럼 지내는 일본인 매니저와 늘 한국과 일본이 어떻게 하면 형제 같은 나라가 될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엔카도 부른 거군요.


“옛날 같았으면 ‘그런 걸 왜 불러’ 했겠죠. 이제는 그런 구분을 짓지 않으려고 해요. ‘가나시이 사케’를 쓴 고가 마사오도 존중합니다. 그는 한국에서 고교를 다닌 엔카의 명작곡가입니다. 이 노래를 부른 일본의 국민가수인 미소라 히바리는 한국계라고 합니다. 장르를 따지기보다 음악이라는 것 하나로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싶어요. 서로 다르다고 구분을 짓기 때문에 편협해지는 것 아닐까요.”

―‘엔카 앨범’을 낼 수도 있겠네요.

“‘고가 멜로디’의 노래를 다시 부를 겁니다. 엔카 중에서 의미가 있는 최고의 작품을 고르고 있어요. 엔카는 일본을 표현하는 중요한 문화 코드거든요. 문화 코드로 양국의 친밀도를 높이는 게 우리의 목표예요. 계란으로 바위 치는 꼴이 될 수 있지만 음악으로 서로에게 화난 한국과 일본의 마음을 풀어주고 싶어요.”

“日관객, 아리랑 듣고 눈물”

―음악으로 한국과 일본에 다리를 놓겠다는 거군요.


“한국과 일본이 ‘가깝고도 먼 나라’가 아니라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로 만들고 싶은 사명이 생긴 거죠. 일본 공연을 할 때 앙코르로 아리랑을 부르면 그 사람들이 울어요. 가사를 알고 우는 건 아닐 겁니다. 아무 이유 없이 감동하는 거예요. 그게 음악인 것 같습니다. 유럽 오페라 무대에서 박수와 환호를 받아 본 적은 있어도, 관객들이 운 적은 없었습니다.”

―한국에선 엔카 앨범을 내는 성악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요.

“제 매니저는 ‘장애를 가진 사람을 데리고 비즈니스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듣고 가슴이 무척 아팠다고 해요. ‘요즘 세상에 순수한 게 어딨느냐’고 하는 사람들에게 ‘순수한 게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힘 있는 사람들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저처럼 힘없는 사람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음악으로 보여드리고 싶어요. 언젠가 굳어진 마음이 풀리고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겠죠. 그런 날은 반드시 올 겁니다. 진심은 통한다면서요.”

▼ 배재철은 ▼

― 1969년 대구 출생
― 1993년 제33회 동아콩쿠르 1위
― 1994년 한양대 성악과 실기수석 졸업
― 1998년 이탈리아 베르디 국립음악원 수석 졸업
― 1998년 ‘프란세스크 비냐스’ 국제콩쿠르 최고 테너상 등 다수의 국제콩쿠르 입상
― 1998∼2005년 유럽과 일본 등의 오페라 무대에서 테너로 활동
― 전 한양대 음대 성악과 겸임교수
― 현 영산콘서바토리 강사,
 보이스팩토리(일본) 소속 성악가

 
박용 기자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