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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류길재]북한의 세트장 연출쇼를 끝내자

입력 | 2016-05-17 03:00:00

무늬만 정당인 북 노동당, 김정은 3대 수령 대관식 치러
소련 출신 영화 감독도 거대 세트장 사회에 충격받은 듯
인민들이 세트장 벗어날 때만 북 정권 붕괴 가능
대북 정책의 핵심은 인민이 나설 여건 만드는 것




류길재 북한대학원대 교수 전 통일부 장관

조선노동당 7차 당 대회는 무려 36년 만에 열린 북한 최대 정치 행사였다. 두말할 필요 없이 이 대회는 김정일 사망 5년 만에 김정은이 북의 3대 수령으로 등극하는 대관식이었다. 김일성 사후 대관식 없이 수령직을 물려받은 김정일과는 다른 선택이다. 후계자로서 경험이 짧은 젊은 지도자가 선택한 정당성 키우기인 셈이다. 비록 새로운 내용의 노선이나 정책이 제시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개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당 대회 개최만으로도 선군을 강조했던 아버지와 차별성을 기하면서, 권력 기반이 군(軍)에서 당(黨)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여줄 수 있다. 1990년대 중반 대기근이 벌어지고 경제난이 폭발했던 그 시점에 김정일이 선택한 선군정치 노선은 위기 대응책이었다. 이 논리의 연장에서 언젠가 위기 상황이 진정되면 당 중심의 정상적인 사회주의 체제로 복귀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다. 필자는 당시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어차피 모든 권력이 수령에게 집중되어 있고, 군대의 간부들도 다 당원이고, 철저한 당적 통제를 받는 상황에서 당이냐, 군이냐의 구분은 무의미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제 당 대회 개최로 당의 기능이 정상 작동하게 되었으니 필자의 당시 생각은 틀린 것일까. 당-국가체제에서 당의 기능 정상화는 당 대회 개최만으로 보장되는 게 아니다. 당의 의사결정 시스템이 작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번 당 대회에서도 극명하게 보여주었듯이 당은 김정은 수령을 위한 보조 장치일 뿐 그 자체로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없다. 무늬만 선당이지 내실은 수령 우선이다. 김정은 시대에는 이것이 더욱 강화된 것이다.

당 대회가 개최되기 직전 러시아의 비탈리 만스키 감독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태양 아래’가 상영됐다. 지도자와 체제를 선전하는 거대한 세트장인 북한에서도 여덟 살 진미의 눈물은 막을 수 없었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마저 새로운 게 아니다. 그러나 옛 소련에서 출생한 감독에겐 매우 충격적이었나 보다. 벌어지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카메라에 담는 다큐멘터리가 북한에 가면 철저하게 기획된 연기로 가득 차게 된다. 당 대회장에서, 김일성광장에서 만세로 환호하는 인민들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현실을 보여주는 배우들이다.

예전에 방북해서 평양 시민들의 자유롭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면서 북한이 변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그건 다 연출된 것”이라고 말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만큼 연출이 세련되고 치밀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년여 동안 필름에 담은 만스키의 눈은 피해 갈 수 없었다. ‘트루먼 쇼’가 북한에서는 영화가 아닌 현실인 것이다.

뻔한 얘기지만 북한은 최고지도자와 그를 떠받치고 있는 한 줌도 되지 않는 소수 특권층을 위해 다수 인민이 희생하는 거대한 악의 현장이다. ‘인민을 위하여 복무함’은 구호로만 존재할 뿐, 오직 수령을 위하여 복무하는 인민만 존재한다. 독재자의 생각이 곧 나라 전체의 생각이고, 당도 엘리트들도 이를 따르기만 한다. 그러므로 핵·경제 병진노선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이 노선은 결국 북 정권을 붕괴의 길에 이르게 할 것이다. 언젠가 말이다. 지금 북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보면 이런 결론에 이른다.

그렇지만 이런 결론에 이르는 것과 북한판 트루먼 쇼를 끝내기 위한 대북 정책은 별개의 것이다. 분명히 인간의 기본 권리를 말살하고, 지도자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우상화와 선전을 자행하고 있는 북 정권과 체제는 인권과 도덕의 측면에서 보면 붕괴할 수밖에 없고, 붕괴되어야 한다. 그러나 북의 비인간적, 비도덕적인 측면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면서 붕괴하라고 주문을 왼다고 붕괴하지는 않는다. 어떤 정권이든 그런 이유로 붕괴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영화 속 주인공 트루먼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결국 세트장을 벗어났듯이, 북의 인민들이 그런 노력을 기울일 때 비로소 북한판 트루먼 쇼가 종영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민들이 나서도록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대북 정책의 핵심 목표일 수밖에 없다. 북이 세트장이냐 아니냐, 붕괴할 거냐 안 할 거냐, 압박이냐 대화냐를 놓고 갑론을박하는 것은 대북 정책을 위한 본질적 고민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진미의 눈물을 멈추게 할 것인지를 놓고 처절하게 성찰해야 한다. 이것이 북한 당 대회가 우리에게 던져준 숙제이다.

류길재 북한대학원대 교수 전 통일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