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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D/Topic]오드리 헵번…로마의 휴일

입력 | 2016-05-17 10:29:00

고승철의 종횡무진 시간기행 ③






자칭 ‘돌팔이 의사’인 S대 의과대학 K교수는 지금까지 비행기 여행에서 응급 환자를 진료한 경험이 8번이나 된다. 의대 교수들끼리는 ‘진료 환자 총원, 불변의 법칙’을 거론하기도 한다. 물론 과장된 농담이다.

“참 묘한 것이 환자를 직접 진료하지 않는 기초의학, 보건통계학 같은 전공자에겐 공교롭게도 기내 환자를 돌봐야 하는 경우가 자주 생기지요. 반대로 응급의학이나 가정의학 등 기내 환자를 진료하기에 적절한 의사들은 오히려 그런 경험이 별로 없어요. 그렇잖아요?”
 
K교수가 뉴욕-서울 기내에서 50대 서양인 여성 환자를 응급진료하고 진땀을 뺀 경험담을 동료교수들에게 털어놓으며 이렇게 말했더니 보건통계학 전공인 N교수도 체험담을 고백했다.

“저도 이상하게도 기내 환자를 자주 만난답니다. 제 전공 직계 스승인 총장님(의과대학 교수 출신의 S대 총장)도 그랬다고 하더군요.”

해부학 전문가인 C교수도 그 나름 애로를 고백했다.

“저는 의과대학 교수이긴 하지만 의사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등산동아리 산행에서 부상자가 생기면 저에게 응급 진료를 요청하는데 그때마다 난감해져요. 모 방송사 과학전문기자는 의학박사인데 의사는 아니라 하더라고요. 그분도 명함에 새겨진 ‘의학박사’라는 타이틀 때문에 저와 비슷한 곤욕을 치르는 모양이에요.”

K교수가 로마에 가는 ‘공식’ 목적은 히포크라테스에 버금가는 고대(古代) 명의 갈레누스에 관한 자료를 찾는 작업이다. 학교 당국에 출장이유로 보고한 것이다. 로마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어의(御醫)였던 갈레누스는 해부학, 생리학, 철학 등 광범위한 내용을 아우르는 저서 <갈레누스 전집>을 남겼다. K교수는 ‘갈레누스와 허준 비교연구’라는 논문을 쓸 참이다.

공식 목적보다 중요한 ‘비공식’ 목적은 병석에 누운 장인의 심부름을 이행하는 것. 정신과 의사 출신인 장인은 눈썹이 짙고 코가 우뚝해 청년시절 별명이 ‘그레고리 백’이었다고 한다. 미남 영화배우 ‘그레고리 펙’과 닮았기 때문이란다. 장인의 성씨는 백이다.

그레고리 펙, 오드리 헵번 주연의 영화 <로마의 휴일>은 1953년 아카데미상을 휩쓸면서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청초한 미모의 ‘세기의 요정’ 오드리 헵번에 상사병 걸린 남자 팬이 지구상에 얼마나 많았으랴. 장인도 그 가운데 하나였단다. 더욱이 장인은 ‘동양판 그레고리 펙’이어서 영화 속 주인공을 동일시하는 경증(輕症) 노이로제를 앓기도 했다.

K교수가 장인에게서 들은 사연은 이렇다. 밀라노에서 열린 정신의학 학술대회에서 장인은 이탈리아 의사 안드레아 도티(Andrea Dotti)와 와인을 마시다 <로마의 휴일>의 여주인공 오드리 헵번을 화제에 올렸다. 취기가 오르자 장인과 도티는 모두 그녀에 대한 광팬이라고 밝혔고 이 때문에 의기투합했다. 도티는 장인에게 덕담을 건넸다.

“귀하는 그레고리 펙과 닮았군요. 만약 오드리 헵번이 귀하를 만난다면 주목할 겁니다.”
 
몇 년 후 장인은 신문에 보도된 오드리 헵번의 재혼 소식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새 남편은 안드레아 도티!  장인은 그의 명함을 찾아내 이탈리아로 국제전화를 걸었다.

“축하하오! 귀하는 대단한 행운아요!”

“고맙소! 그렇잖아도 오드리에게 그레고리 펙 닮은 코레아 의사가 있다고 했더니 꼭 만나고 싶다고 하오.”

“그래요? 그럼 올 가을 로마에서 열리는 프로이트학회 행사에서 볼까요?”

“좋지요. 이왕이면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스페인 광장 부근에서 봅시다. 그곳 레스토랑을 예약하겠소.”   

장인은 그렇게 해서 오드리 헵번을 만나 꿈같은 저녁식사 시간을 가졌단다. K교수는 이에 대해 반신반의했다. 장인이 상상의 세계를 현실로 착각한 것 아닌가 하고.

장모는 오드리 헵번 이야기만 나오면 펄쩍 뛴다. 평소 남편을 ‘백원장’ 또는 ‘닥터 백’이라 부르는 장모는 이때는 호칭을 ‘영감탱이’라 바꾼다.

“저 영감탱이가 정신병자 오래 대하다보니 본인도 돌았어! 시골 뒷간에 오래 앉아 있으면 온몸에 똥냄새가 배는 것처럼….”

교양미 풍기는 말투가 특기인 장모가 이런 상스런 말을 할 만큼 과민반응을 보인다. 그때마다 K교수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장모를 달랜다.

“오드리 헵번 여사와 라이벌이셨군요! 어머님이 승자이니 노여움을 푸세요.”

2015년 2월 설날 연휴 때 서울 동대문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리는 오드리 헵번 관련 사진 전시회에 K교수는 장인을 모시고 갔다. 물론 장모에게는 극비에 부치고…. 장인은 헵번 여사의 아리따운 청춘 모습뿐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하던 노년 사진 앞에서도 한참동안 서 있었다.

K교수는 눈가 물기를 훔치는 장인에게 슬쩍 물었다.

“실물이 사진보다 낫던가요?”

장인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뭔가 진정성이 느껴졌다. 오드리 헵번과 직접 만났다는 사실이 신빙성 있게 여겨졌다.

2016년 2월 설날, K교수는 장인에게서 세뱃돈 대신 로마의 호텔 숙박권을 선물로 받았다. 로마의 새 명물로 부상한 팔라조 펜디 호텔의 3박4일 숙박권! 1박 요금이 몇 천 달러라는  ‘럭셔리 극치’의 명소라는데…. 명품 브랜드 ‘펜디’의 본사 건물이었으나 최근 매장과 호텔로 개조했단다. 호텔의 객실은 단 7개.

“아버님, 웬 숙박권입니까?”

장인이 이 호화판 호텔의 초대권을 받은 것은 수십 년 전의 인연 덕분이었다. 오드리 헵번을 만나러 로마로 가던 비행기에서 진료한 응급 환자가 감사의 표시로 로마에서 식사 초대를 했단다.

“자네도 알다시피 내 전공이 정신과여서 기내에서 응급 환자를 만나면 난감해지지. 그날도 어느 30대 이탈리아 여성이 호흡 곤란으로 의식을 잃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곤 마우스-투-마우스 인공호흡법밖에 없더라구. 입을 바로 맞추려 하니 서양인 여자의 오똑 선 콧날이 걸리적거리더군. 비스듬히 입을 맞춰 호흡시키느라 애를 먹었지. 다행히 곧 의식을 회복했고….”

그녀는 로마 시내 레스토랑에 호화로운 모피 코트를 입고 나타났다. 알고 보니 그녀는 세계적 명품 브랜드 펜디 가문의 혈족이었다. 그녀에게서 선물로 받은 가죽 브리프 케이스에는 펜디 브랜드인 ‘F’가 선명히 찍혀 있었다.

그 후 장인은 로마에 갈 때마다 그녀를 만났다고 한다. 그녀는 장인을 ‘생명의 은인’이라 부르며 툭하면 구두, 양복, 가방 등을 선물했다. 세월이 흘러서도 이런 정성은 변함이 없어 새로 개관한 펜디 프라이빗 스위트룸 숙박권을 보내왔단다.   

“나는 요즘 허리가 아파 누워있으니 로마에 갈 엄두가 나야지. 자네가 거기 간다 하니 심부름을 하나 해야겠네.”

“무슨 일인지요?”

장인은 뜸을 들이더니 대답했다.

“오드리 헵번을 만났던 ‘알라 람파’라는 레스토랑을 찾아가서 창가 쪽 어느 테이블 위에 내가 쓴 글씨가 남아있는지 확인해 오게.”

“어떤 글씨인데요?”

“한글로 썼으니 남아있다면 금세 알아볼 수 있을 거야. 사진을 찍어 오게.”

“중요한 것인가요?”

“그러니 자네를 보내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 프로젝트는 자네 장모와 처에게도 비밀로 하게. 명심하게!”

K교수는 로마행 기내에서 장인의 당부말씀이 떠올라 쓴 웃음을 지으며 와인을 마셨다. 약간 취기가 오르자 혹시 자신에게도 ‘펜디 가문녀’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공상도 했다.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라 했던가. 기내 상영 영화 <트럼보>가 그랬다. 할리우드의 전설적시나리오 작가 돌턴 트럼보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그린 영화였다. 트럼보는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의회에 소환되고 의원들의 질문에 묵비권을 행사하는 바람에 의회모독죄로 1년간 수감된다. 그 후 본명으로는 작품을 발표할 수 없어 11개 필명으로 숱한 작품을 썼다. 트럼보의 시나리오는 아카데미 각본상을 2개나 받는다.

<트럼보> 영화에 트럼보가 쓴 시나리오로 만든 흑백 영화가 비친다. <로마의 휴일>!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펙이 스페인광장에서 만나는 장면이다. 도망 나온 공주와 신문기자의 조우(遭遇)가 사랑으로 싹튼다는 로맨스 스토리.

K교수는 장인의 오드리 헵번 관련 발언을 지금까지 사실상 건성으로 들었다. <로마의 휴일>은 스틸 사진으로만 몇 장면 봤지 동영상은 처음이다.

펜디 호텔은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 명품이 즐비한 1층, 2층 부티크를 아래에 깔고 3층 스위트룸으로 들어서니 천장에 달린 아델만 샹들리에가 훤한 빛을 비춘다. 프리츠 한센의 디자인 예술이 빚어낸 목제 안락의자와 캄파냐 형제의 장인정신이 깃든 소파가 여독을 풀어준다. 안락의자에 잠시 몸을 맡겼다가 서둘러 장인 심부름을 하러 그 레스토랑으로 달려갔다.

‘알라 람파’에 들어서니 거의 전 좌석에 손님들이 앉아 있다. 오렌지색 테이블보가 덮여 테이블 위에 쓰인 글씨를 찾아내려면 애를 먹을 것 같다. 무슨 수로 테이블보를 들추어 보나? 일단 자리에 앉아 묘수를 찾아보자. 마침 창가에 빈 자리가 생겨 얼른 가서 앉았다.

“실례합니다. 여기는 예약석인데요.”

배불뚝이 노인 웨이터가 다가오더니 K교수에게 정중하게 알린다. K교수는 한국에서 이 레스토랑에 예약하려 했으나 1인 예약은 받지 않는다고 해서 일단 찾아왔다. 엉거주춤 일어서서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

“혹시 K교수님 아니세요?”

큼직한 펜디 선글라스를 쓴 한국여성이 불쑥 나타나 이렇게 물었다. 아마 그녀도 이 레스토랑에 혼자 찾아왔다가 자리를 잡지 못해 서서 기다린 모양이었다.

“그렇습니다만….”
“아, 반갑습니다. 지난번 인문학강좌에서 교수님 특강, 잘 들었습니다.”
“예?”
“그, 있잖아요. 예술의전당에서 ‘제중원의 유래’에 대해 강의하셨잖아요.”
“아, 예… 반갑습니다.”
그 중년여성이 거침없이 악수 손을 내밀기에 K교수는 얼떨결에 그녀의 손을 잡았다.

“오늘이 5월 15일, 한국으로 치면 ‘스승의 날’이지요? 여기 로마에서 스승님을 만났으니 제가 식사를 모시겠습니다. 이것도 인연인데….”

K교수는 특강 한두 번 들었다고 제자로 자처하는 이런 부류의 ‘아마조네스’가 두려웠다. 사진을 찍자느니 다시 만나자느니 하며 치근대면 뒷감당을 어찌할 것인가. 한국에서라면 당연히 적당한 핑계를 둘러대며 사절했겠으나 오랜 비행시간 탓인지 머리도 몽롱하고 해서 어정쩡하게 수락하고 말았다. ‘인연’이라는 말이 귀에 거슬렸다.

K교수는 배가 고팠으나 그녀와 인연을 맺기가 거북해서 ‘방금 밥을 먹고 왔다’고 둘러대고 커피만 마시기로 했다. 그녀는 제법 묵직한 풀코스 요리를 주문했다.

“교수님, 무슨 일로 로마로 오셨어요?”
“학술 자료 찾으려….”

그녀는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었다. K교수는 모두 어물쩍 대답했다.

그녀가 내민 명함엔 ‘M부티크 대표/ 럭셔리 평론가’라고 표기돼 있다.

“가을 상품 좀 보러 밀라노에 왔다가 로마에 이틀 여정으로 왔어요.”

그녀는 명품 수입상이란다. 핸드백, 여성의류, 액세서리 등 명품을 수입해서 한국의 귀부인들에게 부티크에서 판매하는 모양이다.

식사를 마치고 그녀의 수다가 이어져 장인 심부름을 이행할 틈을 찾지 못했다.

“교수님, 어디 불편하세요?”

그녀가 ‘단도직입’적으로 묻기에 K교수도 짜증이 난 김에 ‘단순무식’하게 답변했다.

“이 식당에서 볼 일이 좀 있소.”
“볼 일이라뇨?”

그녀는 주제넘게 깐죽거리며 물었다.

“알 것 없소.”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테이블보를 슬며시 쳐들었다. 테이블 위에 무슨 글씨가 있을까?
이 모퉁이, 저 모퉁이 들추어도 글씨는 보이지 않았다. 옆 자리 손님이 떠나 빈 테이블이 되었다. K교수는 반사적으로 그 자리로 옮겨 테이블보를 들추었다.
 
“뭐 하는 짓이오?”

전설적인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닮은 배불뚝이 웨이터가 다가와 K교수에게 고함쳤다. K교수는 순간 당황했다. 웨이터가 영어 대신 빠른 이탈리아어로 말하는데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아마 식당에서 이렇게 하면 재수 떨어진다는 뜻인 듯했다. 쩔쩔 매는 K교수에게 나타난 구세주는 럭셔리 평론녀였다.

“교수님, 볼 일이 이것이었나요? 뭘 찾으시는 거예요?”

K교수는 어딘가에 남은 글씨를 찾는다고 말하고 그 테이블에 오드리 헵번이 앉았다고 덧붙였다. 그녀는 유창한 이탈리아어로 그런 사정을 설명했다. ‘오드리 헵번’을 특히 강조했다.

“오드리 헵번?”

웨이터는 찌푸렸던 얼굴을 활짝 펴며 한 구석의 테이블로 안내했다. 이 레스토랑에서 평생을 보냈다는 그는 오드리 헵번이 이 레스토랑에 올 때마다 앉는 테이블이 거기라고 말했다. 마침 그 자리는 비어 있었다.
 
K교수는 성스런 제의(祭儀)를 집전하는 사제처럼 눈을 잠시 감고 기도를 올린 다음 테이블보를 들추었다. 목제 테이블의 표면은 노인의 피부처럼 기름기가 빠져 거칠거칠하고 누렇다. 아무런 글씨가 보이지 않았다. 실망하고 테이블보를 도로 덮으려다 K교수의 머리엔 창가 커튼을 젖혀보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여기가 어두워 안 보이는 게 아닐까.
 
커튼을 젖히고 테이블보를 홀랑 벗겼다. 자세히 살펴보니 무슨 글자가 희미하게 보이는 듯했다. 한글 비슷한 글자이긴 한데 글씨가 작은데다 뭉그러져서 판독하기 어려웠다. 부쩍 심해진 K교수의 노안 증상 탓에 잔글씨는 눈앞에서 아물거리는 것도 원인이었으리라.

“앗! 글자가 보이네요!”

 럭셔리 평론녀가 환성을 질렀다. 그녀는 한 자, 한 자 천천히 읽었다.

“그-레-고-리-백, 오-둘-희, 역-사-적-인-만-남…”   

고승철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