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동 경제부 차장
경제학의 게임이론에 등장하는 ‘최후통첩 게임(Ultimatum Game)’이다. 서로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양쪽이 공멸(共滅)한다는 게 이 게임의 핵심이다. 최근 현대상선의 용선료 인하 협상이 이와 닮았다. 정부와 채권단은 외국 선주(船主)들에게 현대상선의 용선료를 약 30% 깎아주라고 요구했다. 현대상선이 지금처럼 10만 원을 계속 내다가는 망하게 생겼으니 앞으로는 7만 원만 받아 가라는 것이다. 만약 선주들이 이를 거부하면 현대상선은 사실상 파산하고 용선 계약도 해지된다. 그러면 채권단도 피해를 보지만 선주들 역시 연간 1조 원에 이르는 용선료를 포기해야 한다. 정부의 용선료 인하 요구는 “우리 제안을 거부하면 다 함께 죽을 수 있다”는 최후통첩인 셈이다.
이 협상엔 허락된 시간도 많지 않다. 데드라인은 사채권자 집회가 예정돼 있는 이달 말경이다. 이때까지 타결이 안 되면 정부는 현대상선을 법정관리로 보내며 판을 엎어버릴 생각이다. 정부는 이 같은 입장을 언론에도 반복해 강조하며 배수진(背水陣)을 단단히 쳤다. “우린 끝까지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그러니 알아서 판단하라”고 경고한 것이다. ‘건너온 다리 불태우기(Burning the Bridge Behind)’라는 협상 전략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내가 ‘배 째라’는 식으로 전의를 불태우면 상대방은 괜히 싸웠다가 손해를 보느니 차라리 후퇴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최근 들어 기류에 변화가 생겼다. 지난 주말 정부는 “낙관도 비관도 하지 않고 있다.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운 협상”이라고 말을 바꿨다. 정부가 다시 신중론으로 돌아선 것은 선주들이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와 비슷한 상황에 빠졌기 때문이다. 용선료 협상은 ‘일대일’이 아닌 ‘일 대 다(多)’의 협상이다. 상대가 여러 명이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일일이 설득하며 풀어야 한다. 선주들은 이 과정에서 ‘나만 용선료를 많이 깎아주는 꼴이 되지 않을까’라는 우려를 품고 있다. 다른 선주들의 협상 전략을 모르는 상황에서 자기만 선뜻 인하 요구를 들어줬다가는 독박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불신이 해소되지 않으면 협상은 틀어지고 결국 모두가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상황이 어려워진 또 다른 이유는 협상이 ‘치킨 게임(Chicken Game)’의 양상을 띤다는 점이다. 최근 선주들의 행태는 좀비기업 청산에 소극적이었던 한국 정부의 성향을 간파해 시간을 벌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협상이 깨지더라도 정부가 설마 국적 선사를 내치겠느냐”는 기대감도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 한국 정부는 협상이 난관에 빠지자 협상의 데드라인을 이달 20일에서 이달 말경으로 한 차례 연기한 상황이다. 정부가 “부실 기업 연명보다 청산이 낫다”는 보다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이번 치킨 게임의 승자가 될 확률은 낮아 보인다.
이번 협상은 초조한 눈치 게임이 막판까지 전개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양측의 치열한 줄다리기 끝에 일정 수준에서 인하 합의가 되고 현대상선은 가까스로 파산을 모면할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론들에 따르면 어떻게든 합의를 하는 편이 모두에게 이롭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 봤자 길고 지루한 구조조정 레이스에서 반 발짝 정도 나간 것일 뿐이다. 은행권의 자금 지원, 채권자 채무 동결, 해운동맹 가입, 실적 개선 등 앞길은 구만리다. 구조조정은 그렇게 힘든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