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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2년 11월 21일자에 실린 나도향의 연재소설 ‘환희’의 첫 회.
동아일보의 첫 연재소설은 1920년 창간호부터 실린 민태원의 ‘부평초’였다. “나는 아홉 살이 되도록 어머니가 계신 줄로 알았다”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프랑스 소설 ‘집 없는 아이’를 번안한 것이었다. 아직 문인의 층은 얇고 창작의 기반은 부실한 때여서 민태원 같은 일단의 ‘문인기자’들이 1인 2역을 수행하는 시절이었다. 당시의 분위기를 대변하듯 시인 겸 기자인 김형원은 문학을 보는 세간의 오래된 시선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문학은 고린내 나는 학문이요 문학자는 실생활에서 제외된 인생이다. 문학은 사회를 문약(文弱)에 빠지게만 할 뿐 활기를 주지 못한다. 꾀죄죄한 선비의 소일거리이지 적극적 건설적인 학문은 아니다.”(동아일보 1920년 4월 20일자)
“어린 도향의 내면적 변화는 시시각각으로 달라집니다. 미숙한 과일과 같이 나날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내놓기가 부끄러울 만치 푸른 기운이 들고 풋냄새가 납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완숙한 것으로 만족한 웃음을 웃는 것이 아니라 미숙한 작품인 것을 안다는 것으로 나의 마음을 위로하려 합니다.”(동아일보 1922년 11월 21일자)
스무 살에 이 장편 연재로 일약 신인에서 문단의 기수로 떠오른 나도향은 연재 첫 회에 붙인 작가의 변에서 그러한 심경을 밝혔다.
그렇게 독점적 대중 매체인 신문을 타고 본격 소설의 시대가 열렸다. 다음 해 1923년 여름에 연재된 염상섭의 ‘해바라기’는 신여성 예술가 나혜석을 모델로 한 작품이어서 여러모로 대중적 관심을 모았다. 이례적으로 1면에 배치되었다. 이어 그해부터 춘원 이광수가 오랜 침묵을 깨고 동아일보를 통해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후 10년간 그는 13편의 소설을 동아일보에 연재하면서 문학적 전성기를 구가했다.
어느덧 신춘문예도 생겨났고 그렇게 문학의 시대는 힘을 받으며 상승 가도를 이어갔다. 앞에서 언급한 문인기자 김형원은 같은 글에서 세인의 통념과 다른 자신의 문학관을 이렇게 덧붙였다.
환란과 궁핍의 시대에도 그렇게 뚜렷하던 소설의 존재감은 이제 문학을 필요로 하지 않는 듯한 사회 속에 집 없는 아이처럼 보이기에 이르렀다. 문학이 불필요할 만큼 완숙하고 풍요한 사회로 올라선 것일까. 아니면 문학을 떠올릴 여지조차 없이 미숙하고 황폐한 정신세계로 퇴행한 것일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독서율 꼴찌라는 나라에서 세계적 문학상의 수상작이 나오는 소설 같은 현실이다.
박윤석 역사칼럼니스트·‘경성 모던타임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