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 음식평론가
‘명의록’은 정조 암살미수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영화 ‘역린’의 소재다. 이야기는 이어진다.
‘암살 시도가 실패한 후, 범인 전흥문은 흥원문(경희궁)으로 빠져나와 달아났고, 강용휘는 금천교(창덕궁) 방향으로 달아난 후, 이튿날 공범 홍상범 등과 개 잡는 집에 다시 모였다.’
중국과 한반도에서는 육축(六畜)을 먹었다. 육축은 집에서 기르는 6가지 짐승으로 소, 말, 양, 돼지, 개, 닭이다. 개의 식용에 대해서는 조선시대에도 말이 많았다. 조선 말기 이유원의 ‘임하필기’에도 개고기 식용을 둘러싼 찬반 사례가 나타난다.
‘연경(지금의 베이징) 사람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을뿐더러 개가 죽으면 땅에 묻어준다. 심상규(1756∼1838)가 연경에 갔을 때 경일(庚日·복날)을 맞아 개고기를 삶아 올리도록 하였다. 연경 사람들이 크게 놀라면서 이상히 여기고 팔지 않았다. 심상규가 그릇을 빌려 삶았는데 그 그릇을 모조리 내다버렸다. (황해도) 장단의 이종성(1692∼1759)은 잔치에 갔다가 개장국을 보고 먹지 않고 돌아와 말하기를, 손님을 접대하는 음식이 아니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달랐다.’
심상규가 성절사로 연경에 간 것은 1812년, 청나라 때다. 중국도 개고기를 제사에 사용했지만 청나라 이후, 중국인들은 개고기를 피한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기마민족이다. 사냥이 주업인 기마민족에게 개는 수렵의 동반자이자 목숨을 지켜주는 동료다. 농경민족의 개와는 지위가 다르다. 남쪽의 광둥 성, 광시 성 등에서는 지금도 개고기를 먹는 반면 북쪽 지역에서는 먹지 않는 이유다. 또 다른 이유는 개가 청 태조 누르하치의 생명을 구했다는 설화 때문이다. 누르하치가 깊은 산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을 때 개가 불길에서 누르하치를 구했다. 청을 건국한 만주족이 개를 먹지 않자 중원의 한족도 따른다.
조선 후기에는 개고기 식용파와 비식용파가 나뉜다. 1791년 사은사 일행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문인 김정중은 ‘연행록’에서 ‘중국인들은 비둘기, 오리, 거위 등을 먹지만 개고기는 먹지 않는다’고 했고, 1712년 청나라를 다녀온 김창업은 ‘연행일기’에서 ‘평안도 가산의 가평관에서 이민족(오랑캐)에게 개고기와 소주를 대접받았다’고 했다.
‘동국세시기’의 기록을 들고 ‘여름철 보양식은 개고기’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타당성이 없다. 여름철엔 휴식, 수면, 운동, 균형 잡힌 식사가 필요하다. 여름철 보양식은 없다.
황광해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