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예상 밖 돌풍… 미 언론이 대선후보 검증하는 ‘공적 담론의 창문’이 깨졌다… 총선에서 부실 여론조사가 바꿔놓은 선거 결과… 여론조사의 정확성 떨어지고 언론 기능 약해지면, 運적 요소가 정치판 흔든다
황호택 논설주간
트럼프의 부상은 미국 사회에서 메이저 언론의 영향력이 현저히 감퇴하고 있음을 확인해준다. 미국 사회에서 메이저 언론은 오랜 세월 동안 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공적 담론을 판단하는 수문장(gatekeeper) 역할을 했다. 메이저 언론이 설정한 공적 담론의 창문(window of discourse) 안에 들어와야 공화당, 민주당의 대선후보가 되고, 국가 정책으로 채용될 수도 있었다. 트럼프의 출현으로 좋든 나쁘든 이 공적 담론의 창문이 깨졌다.
메이저 언론은 줄기차게 트럼프를 공격했지만 그의 질주를 막지 못했다. 트럼프의 지지자들은 공화당 지도부와 주류 언론이 트럼프를 추락시키기 위한 음모에 가담했다고 믿었다. 어느 나라에서나 미디어 환경의 급속한 변화로 메이저 언론의 수문장 기능이 약해져 가고 있다. 한국에서 주류사회가 규정하던 담론의 창문을 깼던 노무현 현상이 10여 년 늦게 미국에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여론조사의 정확도를 떨어뜨리는 결정적 이유는 휴대전화를 이용하지 못해 표본의 응답률이 낮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휴대전화를 여론조사에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요즘 집전화를 받는 20, 30대는 거의 없다. 여론조사 기관들은 500명 표본의 여론조사에서는 20, 30대 연령의 150명과 통화를 해야 하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잘 안 잡히니 50명만 하고 나서 그 결과에 ‘곱하기 3’을 해버리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집에서 주로 전화를 받는 건 주부 고연령층 자영업자들이어서 여론조사에 친여(親與) 편향의 오류가 생기기 쉽다.
D―7부터 여론조사 공표를 금지하는 깜깜이 선거도 오류를 부채질한다.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편협)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선거 당일 누구한테 투표할지 결정하는 유권자가 12%, D―3일까지 후보자를 결정 못한 유권자가 30%에 이른다”고 말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언론재단, 편협 등은 포럼을 결성해 선거여론조사 보도의 관련 법령 개정안과 보도준칙을 마련할 계획이다.
한국은 여론조사의 정확도를 높이려는 노력을 안 하고 부실 여론조사로 대선후보와 국회의원후보 단일화를 하고, 경선까지 치르는 나라다. 노 전 대통령은 여론조사로 정몽준을 누르고 여권 단일후보가 됐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대의원 선거에서는 졌지만 여론조사에서 이겨 박근혜 대통령보다 먼저 대통령을 했다.
대선 때가 되면 후보들의 사주(四柱·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의 네 간지)를 알아내 대권의 향방을 점치는 무속인들이 호시절을 만난다. 나는 무속인들이 간지 네 개만 갖고 차기 대통령을 점친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들도 결국 뉴스를 통해 얻은 지식과 주변 사람들의 말에 자기의 판단을 덧붙여 승자를 예측할 것이다. 사주는 손님을 끄는 신비주의의 포장일 뿐이다. 여론조사의 신뢰도가 떨어지고 대중매체의 합리적 검증이 힘을 잃으면 정치에서 운적(運的) 요소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고 트럼프 같은 이상 돌풍이 잦아질 수밖에 없다.
황호택 논설주간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