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간 전부터 역에 나와 아들을 기다린 아버지는 그러나 집으로 가는 동안 살가운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막상 사랑하는 애인을 만나면 수줍어 말 못하는 총각처럼 오히려 무뚝뚝하게 아들의 짐만 자전거 짐칸에 싣고 앞장섰다. 그리고 아들이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날에는 바리바리 짐 보따리를 자전거 뒤에 가득 싣고 한 시간 전부터 또 휭 하니 광천역으로 나가셨다.
‘낯선 서울에서 몸조심하고 공부 열심히 하고 못된 친구들과 어울리지 말고 세끼 밥 꼬박꼬박 잘 챙겨 먹어라. 넌 장남이니 우리 집의 기둥이다. 네가 잘되어야 네 동생들도 본받아 잘할 거 아니냐. 이 아버지는 너만 믿는다.’ 아마 아버지는 이런 말들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러나 기차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끝내 심중의 말을 꺼내지 않으셨다. 아버지와 아들은 침묵으로도 얼추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으니 말이란 어차피 거추장스러운 것이었는지 모른다.
아들 장사익은 40대 중반에 이르러 뒤늦게 소리꾼으로 데뷔했다. 열다섯에 상경하여 30년 만이었다. 그 이후 빠르게 정점을 향해 나아갈 때 아쉽게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차례로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의 기나긴 기다림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 즈음이었다. 오랜 기다림이 끝났으니 마음 놓고 훌훌 떠나신 걸까.
갈팡질팡하거나 느린 걸음일지라도 기다려주는 사람만 있다면 끝까지 갈 수 있다. 걸음마를 배울 때 엄마가 팔을 벌려 기다리면 넘어져도 불끈 일어났듯이.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큰 격려는 변치 않는 기다림인지 모른다.
윤세영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