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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보미 기자의 야구찜]유희관과 헤밍웨이

입력 | 2016-05-27 03:00:00

이상적 투수는 훌륭한 작가와 같아… 쉬운 단어, 짧은 문장으로 심금 울린
노벨상 수상자이자 대문호 헤밍웨이… 타이밍과 제구로 리그 지배 유희관
구속 느리다고 가혹한 잣대 대서야




두산 유희관

임보미 기자

등판 때마다 상대 팀에 한 점도 내주지 않는 투수는 단 한 명도 없다. ‘국보 투수’로 불렸던 선동열 전 KIA 감독도 현역 시절 경이적인 0점대 방어율을 기록했지만 한 시즌 내내 단 한 점의 점수도 내주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기당 평균 실점을 의미하는 평균자책점에서 2점대면 수준급 투수로 분류된다. 또 6회까지 3점 이내의 실점을 허용하는 ‘퀄리티 스타트’를 한 선발 투수는 주어진 임무를 완수했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최고 구속이 시속 130km대에 머무는 볼 때문에 ‘느림의 미학’으로 불리는 두산 유희관(30)에게 들이대는 잣대는 좀 다르다. 다른 투수들보다 훨씬 엄격하다. 지난해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승리투수가 되며 두산의 우승을 결정지었지만 올 시즌에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올 시즌 선발로 나선 첫 두 경기에서 유희관이 평균자책점 12.46으로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는 또다시 ‘이제 끝났다’는 냉혹한 평가가 쏟아졌다.

안방이 잠실구장이기 때문에 이득을 보고 있다는 평가도 그를 늘 따라다닌다. 다른 구장에선 외야 담장을 넘겼을 타구도 담장 앞에서 잡히는 잠실구장은 투수에게 유리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야구에서 승부는 상대적이다. 유희관만 잠실에서 던지는 것이 아니다. 상대 팀의 투수들도 잠실에서 던진다. 유희관은 지난해 18승을 거두는 동안 569개의 아웃카운트를 잡았다. 국내 투수 중에서 582개를 잡은 윤성환(35·삼성)에 이어 2위였다. 승수에서는 국내 투수 중 단연 1위였다.

메이저리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빌리 빈 단장의 일화를 다룬 책 ‘머니볼’에는 투수와 작가를 비유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상적인 투수는 어떤 면에서 작가와 유사하다. 작가들이 그러하듯 투수들도 경기 상황을 창조하고 게임의 색조를 설정한다. … 만일 투수의 최고 가치를 구속만 가지고 평가한다면, 그것은 마치 훌륭한 문학작품을 놓고 그 안의 단어나 어휘만으로 평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좋은 투수의 기준은 아웃 숫자를 늘리는 능력만으로 충분하다. 어떻게 늘리는가는 논외의 문제다.’

삼성 류중일 감독은 강속구 투수를 사랑하기로 유명하다. 한 시즌 무난한 활약을 펼친 외국인 투수도 ‘더 빠른 공을 던졌으면 좋겠다’는 류 감독을 만족시키지 못해 재계약에 실패했을 정도다. “투수는 일단 강속구가 있어야 산다”는 류 감독에게 유희관에 대해 물었다. 다른 평가가 나왔다. “희관이는 다르지. 팔 스윙이 빠르고 릴리스포인트가 앞에 있어서 타자들이 느끼는 속도는 훨씬 빨라. 제구도 좋고.”

유희관도 한때는 빠른 공을 던지려고 애썼다. 상무 시절 박치왕 감독은 그런 유희관에게 “쓸데없이 더 빨리 던지려고 애쓰지 말고 네가 잘하는 걸 더 잘하도록 신경 쓰라”고 조언했다.

제대 후 무명이었던 2013년, 두산 구단이 중요하게 여기는 경기인 LG와의 어린이날 잠실더비에서 유희관은 선발 데뷔전을 치렀다. 갑자기 담 증세를 호소한 에이스 니퍼트를 대신한 ‘땜빵’ 선발이었다. 니퍼트가 던지는 시속 155km짜리 포심 패스트볼은 없었지만 유희관은 이날 17개의 아웃카운트(5.2이닝)를 실점 없이 잡아냈다. 타이밍과 제구라는 자신만의 무기를 갈고닦은 결과였다.

미국의 작가 윌리엄 포크너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사진)를 두고 “독자들이 사전을 찾아보게 만드는 단어는 쓰지 않는다”고 깎아내렸다. 이에 헤밍웨이는 “가엾은 포크너! 큰 단어에서만 큰 감성이 나오는가?”라고 반문했다. 헤밍웨이는 여섯 단어로 심금을 울린 이야기를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아기 신발 팝니다. 한 번도 신은 적 없어요).’

포크너는 1949년, 헤밍웨이는 1954년 각각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포크너도 헤밍웨이도 훌륭한 작가이듯, 니퍼트도 유희관도 훌륭한 투수다. 획일적인 잣대로 대상을 평가하는 것만큼 오만한 건 없다.
 
임보미 기자 b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