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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악! 엽기 비웃는 異常범죄 시대

입력 | 2016-05-28 03:00:00

[2人의 프로파일러가 말하는 한국의 ‘異常 범죄’]




20일 오전 서울 서초경찰서 진술녹화실. 경찰청 범죄행동분석관(프로파일러) 권일용 경감(52)과 강남 화장실 살인사건 피의자 김모 씨(34)가 마주 앉았다. 잠시 뒤 수갑을 찬 김 씨가 고개를 들었다. 권 경감과 눈이 마주쳤지만 피하지 않았다. 김 씨는 17일 오전 1시 반경 범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9시간 만에 경찰에 붙잡혔다. 거미줄 같은 폐쇄회로(CC)TV를 피해 가지 못했다. 검거는 빨랐지만 김 씨가 왜 그토록 잔인하게 여성을 살해했는지 쉽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를 만난 프로파일러는 이 사건을 ‘조현병(정신분열증)을 가진 자의 묻지 마 범죄’로 결론 내렸다. 망상과 편집증으로 사고가 왜곡돼 마음 한구석에 타인을 향한 이유 없는 분노가 있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분노 표출의 대상이 여성에게만 국한되지는 않았다고 봤다. 경찰이 이 사건은 여성 혐오 범죄로 보기 어렵다고 밝힌 이유다.

“악인을 비난하기는 쉽지만 이해하기란 너무도 어렵다.”

러시아 대문호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1821∼1881)의 문장을 가슴에 새기고 일한다는 한 프로파일러는 2016년 한국을 ‘이상 범죄의 시대’로 정의했다. 분노와 적개심, 개인적인 스트레스를 불특정 다수에게 폭발시키는 묻지 마 범죄, 순간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분노 충동 범죄가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프로파일러의 눈을 통해 한국의 이상 범죄를 들여다봤다.


▼ “약한 상대 정확하게 골라내는 비열함이 그들의 속성” ▼


추모 포스트잇 19일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10번 출구에 ‘강남 화장실 살인사건’의 피해자를 추모하는 형형색색의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경찰은 정신분열증을 앓는 한 30대 남성이 저지른 범죄로 결론 내렸다. 뚜렷한 범행 동기도 없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무 관계도 없는 ‘묻지 마형 이상(異常) 범죄’였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3, 4년 전부터 우리가 만난 살인범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아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경찰청 범죄행동분석관(프로파일러)이 털어놓은 이야기에는 그들의 고뇌와 애환이 녹아 있었다. 프로파일러는 대중이 ‘당장 사형에 처하라’ ‘얼굴과 신상을 낱낱이 공개하라’고 분노하는 흉악범 앞에 마주 선다. 하지만 그들은 범죄자를 윽박지르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그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마음껏 하라. 이야기를 들어주러 왔다”며 말문을 연다.

범죄자의 이야기를 몇 시간씩 한결같은 표정으로 들어주는 건 진이 빠질 정도로 극심한 ‘감정노동’이다. 그들이 억울한 범죄 피해자가 아니라 악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17일 서울 강남 화장실 살인사건이 발생한 바로 그날 경찰청 법최면실에서 국내 1호 프로파일러 권일용 경감(52)과 서울지방경찰청 이주현 경사(37·여)를 만났다.

“수사의 패러다임이 바뀌었습니다. 피해자 주변을 조사해도 이제 범인을 잡을 수 없습니다. ‘묻지 마형 범죄’ ‘분노·충동 조절 실패형 범죄’는 만난 적 없는 제3자를 노립니다. 범인의 내면의 이야기를 끄집어내야 그들의 특성을 알고 범죄를 억제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이상 범죄의 시대

17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증거분석실에서 함께한 권일용 경감(오른쪽)과 이주현 경사. 두 사람을 포함해 경찰 프로파일러 10명은 한국의 이상 범죄를 심층 분석한 보고서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프로파일러들은 최근 잇따르고 있는 묻지 마 범죄, 분노·충동 범죄 등의 분석을 통해 우리 사회가 ‘이상 범죄의 시대’에 들어섰다고 결론 내렸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권 경감은 현장에서 몸으로 느낀 범죄의 변화부터 설명했다. 1990년 이전까지 개인적인 원한과 치정, 금전 갈등 등 범죄자의 범행 동기는 비교적 뚜렷했다. 경험 많고 유능한 수사반장은 피해자 주변 수사를 통해 용의자를 추렸다. 그리고 곧 검거했다. 1990년대 들어 지존파와 막가파 같은 범죄조직이 등장했다. 그들은 “부자는 다 죽어야 한다” 등 세상을 향해 가시 돋친 분노를 표출했다. 2000년대엔 유영철 정남규 강호순 등 세상을 경악하게 한 연쇄살인 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다.

2010년 이후 폐쇄회로(CC)TV가 곳곳에서 감시의 눈초리를 부릅떴다. 정보기술(IT)의 발달로 경찰의 과학수사도 날개를 달았다. 강력범죄는 한풀 꺾였다. 대신 한낮 길거리에서 회칼을 휘두르고, 예비군 훈련장에서 총기를 난사하는 등 분노와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 범죄가 이어졌다.

프로파일러는 현재를 이상 범죄의 시대로 정의했다. 이상 범죄란 금품 성욕 원한 같은 뚜렷한 동기 없이 아무 관련 없는 대상을 노린 범죄다. 동기와 대상이 분명해도 시신을 잔혹하게 훼손하는 등 수법이 과도하게 잔인한 경우도 포함된다.

권 경감과 이 경사 등 프로파일러 10명은 이상 범죄를 묻지 마형 범죄, 분노·충동 조절 실패형 범죄, 비전형(非典型) 범죄 등 세 유형으로 분석했다. 그리고 ‘한국의 이상 범죄 유형 및 특성’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범죄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서다.

이상 범죄를 분석한 효과는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잔혹한 방식으로 피해자를 살인한 용의자가 도주한 사건에서 현장 경찰과 프로파일러는 공개수배 전환 시점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권 경감은 “금방 잡을 수 있다”며 공개수배를 지지했다. 그는 “분노·충동 조절 실패형인 범인은 공개수배로 전환되는 순간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돌발행동을 저지를 것이라 확신했다”고 말했다. 권 경감의 예측대로 범인은 공개수배로 전환되자 난동을 부리다 검거됐다.



범죄자 얼굴 공개 효과는…

프로파일러가 이상 범죄의 실체를 분석하는 건 ‘평범한 이웃’의 얼굴을 한 범인에게 선량한 시민이 아무 이유 없이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권 경감은 “이상 범죄자는 피해자와 상호작용에서 생긴 감정이 아니라 개인적·주관적인 감정을 범죄로 표출한다”고 말했다. 몇 년 전 버스 정류장에서 연인이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지나가던 남자는 다짜고짜 연인에게 다가가 흉기로 여자를 찔렀다. 범인은 “그들을 죽여야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았다”고 말했다. 권 경감은 “자신이 겪은 불행한 감정을 타인을 파괴해서 풀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이상 범죄자는 불특정 대상 중 특히 여성을 공격한다. 분노·충동에 휩싸여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범죄를 저지르는데 어떻게 정확하게 자신보다 약한 여성만 골라낼까. 권 경감은 “물불 가리지 않는 막가파식 범죄자도 바닥에는 자기 보호 본능이 깔려 있다”며 “자신보다 약한 상대를 정확히 골라내는 비열함이 범죄자의 속성”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범죄자의 얼굴’이 따로 있을까. 얼굴을 그릴 수는 없지만 범죄자의 공통적인 특성은 있다고 한다. 권 경감은 “스스로를 사회에서 배제됐다고 생각하고 노력해도 바꿀 수 없다고 믿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연스럽게 흉악범 얼굴 공개 문제로 화제가 이어졌다. 범인의 얼굴을 대중 앞에 공개하면 과연 범죄 억제 효과가 있을까. “글쎄.” 프로파일러의 짧은 답이었다.

이들은 정신질환 범죄 예방을 위한 매뉴얼을 만들고 있다. 강남 화장실 살인사건으로 불거졌지만, 사실 매뉴얼 작성에 착수한 지는 오래됐다. 매뉴얼을 이용해 현장에서 만난 정신질환자에게 치료 및 보호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조현병 범죄 예방책은 병의 이름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권 경감은 “조현(調絃)이란 현악기의 줄을 고른다는 의미다. 줄이 고르지 않으면 이상한 소리가 나듯 이상 징후가 보이는 정신질환자를 정확히 파악해 치료 기회를 제공하면 된다”고 말했다. 이 경사도 “살인 같은 강력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사람을 주먹으로 공격하거나 주차된 차량을 파손해 입건되는 전조 증상이 있다”며 “미리 적절한 치료나 보호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조현병이 원인인 범죄는 발생 비율이 낮지만 참혹함 때문에 위험성이 부각된다. 권 경감은 “악마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믿는 사람이 저지른 범죄니 얼마나 잔혹하겠느냐”며 “문제는 조현병 환자를 돌보는 가족까지 점차 사회에서 고립되는 것 같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상 범죄 대응은 가능할까


이상 범죄자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권 경감은 “범인을 마주하면 공포로 인한 신체 변화로 몸이 얼어붙는다”고 말했다. 대응이 쉽지 않다는 뜻이다. 이 경사는 “묻지 마 범죄 예방을 위해 밤늦게 길을 갈 때 가능한 한 뒤에 오는 사람을 먼저 보내고 난 뒤에 걸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경찰 프로파일러는 경찰청과 각 지방경찰청에 40여 명이 활동 중이다. 남자 직원이 많은 다른 경찰 조직과 달리 프로파일러는 70%가 여성이다. 이번 보고서 작업에 참여한 프로파일러 10명 중 7명이 여자다. 이 경사는 “심리학 전공자가 학문을 현장에서 적용하고 싶다는 생각에 많이 지원한다”고 전했다.

이 경사는 현재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다. 배 속 아기 때문에 잔혹한 범죄자를 만나는 일이 꺼려지지 않을까. 이 경사는 “엄마가 좋아하는 일을 하니 아이도 이해해주지 않을까요? 현장에서 분석한 범인의 유형대로 진범이 잡혔을 때 가장 기쁘고 보람을 느낀다”며 활짝 웃었다.

박훈상 tigermask@donga.com·김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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