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활 논설위원
최은영과 현정은은 경영과 무관한 ‘재벌가(家) 사모님’으로 지내다 남편이 타계한 뒤 기업 총수를 물려받았다. 최은영의 남편인 조수호 회장은 2006년, 현정은의 남편인 정몽헌 회장은 2003년 세상을 떠났다.
‘해운 여걸’은 착각이었다
최은영이 경영에 뛰어들 때는 세계 경제가 호황을 누리던 끝물이어서 특별히 신경을 안 써도 해운사가 돌아가던 시절이었다. 회사의 ‘신임 여(女)회장 띄우기’ 기류에 올라타 경영의 무서움을 간과했을 수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해운 경기가 급전직하했지만 리스크 대책은 낙제점이었다. 결국 2014년 한진해운을 시숙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에게 넘겼지만 회사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 뒤였다.
‘현정은 현대상선’도 불황의 직격탄을 맞은 것은 마찬가지지만 이 회사의 비극은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현대상선은 2000년 1차 남북 정상회담 직전 4억5000만 달러 대북(對北) 불법송금에 동원된 핵심 계열사였다. 김대중 정권 실세들 종용으로 현대상선은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에서 4900억 원(약 4억 달러)을 대출받아 2억 달러 이상을 김정일에게 보냈다. 김충식 당시 현대상선 사장이 “산은에서 대출받은 돈은 현대상선이 쓴 돈이 아니니 정부가 갚아야 한다”고 말한 것은 기억에 선연하다. 남편의 타계 후 회장직에 오른 현정은은 개인 비리를 저지른 김윤규 부회장을 내치며 강단 있는 모습도 보였지만 경영능력은 합격점과 거리가 멀었다.
전문경영인 체제와 오너 체제는 각각 장단점이 있다. 그러나 최은영과 현정은의 경우 기업이 돌아가는 구조도 모르는 상태에서 ‘벼락 완장’을 차고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경영 파워를 행사한 것이 실패를 불렀다. 남편을 일찍 떠나보낸 비운(悲運)은 안타깝지만 경영자로서의 책임은 별개의 문제다.
두 사람은 경영 사령탑에 오른 뒤 소수의 ‘측근 비선 라인’에 의존해 내부 구성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한진해운과 현대상선 임원 인사의 난맥상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대차대조표 같은 기업의 기본적 재무제표를 제대로 이해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최은영은 채권단 공동관리 결정이 내려지기 직전 자신과 두 딸이 보유한 한진해운 주식 96만 주를 모두 팔아치운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현정은이 300억 원의 사재(私財)를 회사 회생에 내기로 한 점은 최은영보다 낫지만 계열사들이 현정은 친족이 대주주인 회사에 일감을 몰아줘 역시 도덕성 논란에 휘말렸다.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이 해외 선사들과의 용선료 협상을 타결하고 충분한 수준의 자구책과 고통분담 대책을 내놓는다면 회생의 길이 열릴 수 있지만 미흡하다면 시장 원칙에 따라 처리할 수밖에 없다. 오너의 아내라는 이유로 갑자기 너무 큰 모자를 썼던 ‘준비 안 된 총수’ 최은영과 현정은의 실패와 추락. 다른 기업에서도 반면교사(反面敎師)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