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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왕, 제약사원은 노예… 거액 돈에 자녀통학-빵셔틀까지

입력 | 2016-06-08 03:00:00

45억 의약품 리베이트… 역대 최다 491명 적발




국내 중소 제약사인 Y사 영업사원으로 일하던 A 씨는 “아침 식사로 먹을 빵을 사오라”는 의사의 부탁을 받고 이른 아침 빵집을 찾았다. 그는 빵을 들고 부리나케 의사의 집에 도착했지만 그 의사는 “내가 말한 빵이 아니다”라며 역정을 냈다. 같은 회사에 근무하던 B 씨는 매일같이 의사 자녀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다시 집으로 데려오는 게 주요 일과였다.

이런 황당한 일들은 경찰이 최근 제약사 임직원과 의사들이 불법 의약품 리베이트를 주고받은 비리를 무더기로 적발하면서 드러난 사례다. Y사의 리베이트는 단순히 뒷돈을 주고받는 데 그치지 않았다. 영업사원들은 ‘감성 영업’이라는 이름 아래 ‘빵 셔틀’, 의사 자녀 통학시켜 주기, 형광등 갈아 주기, 의사 가족 생일 선물까지 챙겨야 했다. 절대적인 ‘갑(甲)’인 의사들은 이런 혜택을 당연시했다. 경찰 관계자는 “제약사가 노예와 다름없는 영업 활동을 했다”고 혀를 내둘렀다.

서울 종암경찰서는 2010년부터 지난해 10월까지 유명 대학병원, 개인병원 등 1070곳의 의사와 병원 관계자들에게 45억 원 상당의 금품을 제공한 Y제약사 임직원 161명과 이 업체로부터 300만 원 이상의 금품을 받은 의사 등 병원 관계자 330명을 약사법, 의료법 위반 혐의로 적발했다고 7일 밝혔다. 이 중 리베이트를 총괄한 제약사 임원 박모 씨(53)와 5년간 9450만 원을 챙기고 경찰 수사가 시작되자 증거인멸을 시도한 개인병원장 임모 씨(50)는 구속됐다.

이번 사건은 역대 단일 의약품 리베이트 사건 중에서는 적발된 사람 수가 가장 많다. Y사는 자사 의약품을 처방해 주는 의사들에게 처방 금액의 최대 7.5배까지 현금으로 되돌려줬다. 그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법인카드로 상품권을 구입한 뒤 현금으로 되파는 ‘상품권 깡’을 하거나 지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먹지도 않은 음식값을 카드로 결제한 뒤 현금으로 돌려받는 수법을 썼다. 유령 회사와 다름없는 설문조사 대행업체나 도매상을 거쳐 의사나 가족들에게 현금이나 법인카드를 제공했다. Y사는 또 리베이트 대상과 기준을 세밀하게 나눠 내부 규정을 만들고 영업사원들이 이 규정을 잘 숙지하고 있는지 정기적으로 시험을 보기도 했다.

경찰은 이번에 적발된 의사 292명을 행정처분할 것을 보건복지부에 의뢰했다. 현행 의료법상 금고 이상의 형을 받으면 의사 자격이 정지된다.

정부는 2010년부터 리베이트를 준 사람뿐만 아니라 받는 사람까지 처벌하는 ‘리베이트 쌍벌제’를 시행하고 있지만 그 후에도 수사 당국에 적발되는 리베이트 사례는 끊이지 않고 있다. 제약업계에서는 제약사와 병원 간 ‘검은 거래’가 근절되지 않고 있는 것은 일부 중소 제약사들이 여전히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제네릭(복제약) 판매에만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Y사 역시 지난해 매출 971억 원을 올린 중소 규모의 제약사다.

제약업계에서는 시장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형 제약사도 리베이트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한 제약사 관계자는 “작은 제약업체는 (리베이트가) 적발돼 죽으나, 약이 안 팔려서 죽으나 똑같기 때문에 리베이트를 주는 업체가 많다”며 “이 업체들 때문에 일부 큰 제약사도 당장 영업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리베이트를 주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김호경 기자 whalefisher@donga.com·김성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