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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南 근로자 지갑에서 나온 北의 삐라 자금

입력 | 2016-06-09 03:00:00


주성하 기자

몇 번 날리는 시늉만 할 줄 생각했는데 북한 삐라(전단)는 반년째 계속 날아온다. 올 1월 북한 핵실험 이후 남쪽이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하자 북한은 거의 40년 만에 다시 남쪽에 삐라를 날려 보내는 것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삐라 날리기 경쟁을 해서는 남쪽이 북쪽을 이기긴 어렵다. 연중 북에서 남으로 바람 부는 날이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많다. 편서풍을 타고 내려온 북한 삐라는 멀리 세종시까지 날아간다.

2월 초 경기 고양시에서 10∼15kg쯤 되는 북한 삐라 뭉치가 통째로 떨어져 승용차를 부숴버린 일이 화제가 됐다. 지난달 30일에도 서울 은평구에서 북한 전단용 대형 풍선 2개가 삐라 묶음을 그대로 단 채 주택가 전깃줄에 걸려 발견됐는데 시간 맞춰 삐라 묶음을 터뜨리는 타이머는 발견되지 않았다. 인구가 밀집된 서울에 삐라를 뿌려야겠다는 의지가 애당초 없다는 뜻이다.

진짜 웃기는 것은 풍선에 흙을 넣은 비닐봉지만 77개 매달려 있었다는 점이다. 전단은 고작 150장뿐이었다. 그걸 보니 북한 심리전 담당자들이 안쓰러워졌다. 몇 개 날렸다는 실적은 보고해야 하는데 정작 전단 만들 돈은 없으니 무게를 채우느라 흙을 넣는 눈속임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만 풍선이 전깃줄에 걸리는 바람에 속임수가 탄로 났으니 당을 기만한 죄로 대남 심리전 담당자 몇 명의 목이 날아갈 것 같다.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다.

주성하 기자

올해 남쪽에 떨어진 삐라 몇 장을 자세히 보니 종이와 잉크, 풍선 제작용 비닐 등이 모두 외국산이었다. 그래서 “돈도 많네.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고 생각했는데 반년도 안 돼 벌써 달러가 바닥 난 모양이다.

삐라와 확성기 방송 등 대남 심리전을 담당한 부처는 북한군 총정치국 적공국(적군와해공작국)이다. 적공국은 외국에서 달러를 벌어오는 부처가 아니다. 그럼 지금까지 어디서 심리전 자금을 충당했을까.

북한 내 소식통은 최근 흥미로운 정보를 전해줬다. 남쪽에 보내는 삐라 자금은 개성공단 남쪽 근로자들의 주머니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현대아산이 개성공단 내에 세운 송악프라자라는 5층 건물의 2층에서 나왔다고 한다.

송악프라자 운영은 현대아산 최후의 대북사업이었지만 2월 개성공단 폐쇄 때 프라자도 함께 폐쇄됐다. 건물 내부에 식당 마트 노래방 당구장 주점 면세점 등 편의시설이 잘 구비돼 있어 과거 현지 근무하던 남쪽 근로자들이 즐겨 찾았다. 프라자 1층에 남쪽이 운영하는 일식집이, 2층에는 북한이 운영하는 평양식당이 있었다. 이 평양식당을 바로 적공국이 운영했다. 적공국은 적의 돈으로 적을 와해시킨다는 취지를 내세워 운영 승인을 받았다.

현대아산 직원으로 1층 일식집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사람을 수소문해 찾았다. 그는 평양관은 큰 무대를 갖추고 아가씨들이 공연도 잘해서 인기가 좋았고 장사도 꽤 잘됐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적공국이 식당을 운영했다는 내막은 모르고 있었다. 부언한다면 그는 현재 북한과는 전혀 무관한 곳에서 일한다. 북한 미녀들의 공연을 보며 남쪽 사람들이 지갑에서 꺼낸 달러가 삐라로 둔갑해 남쪽으로 다시 날아 돌아온다니 기가 막힌 일이다.

적공국은 대북 확성기에 대응해 맞불 방송도 하고 있다. 적공국 출신 탈북자는 확성기가 일본 제품이라 부품이 고장 나면 중국을 통해 어렵게 구해야 했다고 증언했다. 거기에 쓰는 외화도 남쪽 근로자의 주머니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과거 북한의 선군(先軍)정치 시절 북한군은 알짜 대남 외화벌이 사업도 차지하고 짭짤한 재미를 봤다. 일례로 금강산 관광이 한창일 때 자연산 회와 털게 등을 팔아 인기를 얻었던 ‘고성항 횟집’도 북한군 총정치국이 직접 운영했다. 그런 내막을 모르는 관광객들은 남쪽 사람들이 자연산 회라면 깜빡 죽는다는 ‘좋은 정보’도 아낌없이 제공했다. 그 덕분에 나중에 간 사람들은 바가지를 뒤집어 써야 했다. 그렇게 남쪽 관광객의 지갑에서 나온 돈으로 총정치국은 방송용 차량을 사와 사단마다 나눠줬다. 그 방송차 스피커에선 지금 “남조선 괴뢰도당을 타도하자”는 구호가 나올 것이다.

적공국도 개성공단이 운영될 때엔 좋았을 것이다. 달러가 들어오기만 하고 쓸 일은 별로 없는 호시절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확 바뀌었다. 지금은 들어오는 돈은 없는데 위에선 “대남 심리전 명분으로 그동안 달러를 벌었으니 이젠 쓸 때”라고 압박할 것이니 죽을 맛이리라. 그동안 번 달러가 전부 금고 속에 있을 리도 만무하다. 사정이 이러니 적공국 사람들은 햇볕정책이 사무치게 그리울 만하다.

북한 삐라 대다수는 박근혜 대통령을 겨냥한 입에 담지 못할 저질스러운 비방으로 채워져 있다. 졸지에 밥줄이 끊기고 궁지에 내몰린 적공국의 분노가 원색적 삐라 위에 철철 넘치는 듯하다.

주성하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