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살인이나 강간 같은 범죄를 저지른 범인의 신상을 공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NHK 방송이나 신문들은 경찰에 체포된 피의자의 이름, 나이, 주소, 직업, 얼굴을 모두 보도한다. 범죄자 응징과 재발 방지, 국민의 알 권리가 피의자 인권보다 중요하다는 인식이 뿌리 깊다. 필자는 특파원으로 일하며 3년 이상 도쿄에서 살았고 지금도 일본의 흐름을 관심 깊게 지켜보지만 비공개를 지지하는 주장은 찾기 어렵다.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도 대부분 강력범죄 피의자 신상을 공개한다.
▷한국은 1990년대 후반 이후 피의자 인권이 강조되면서 범인의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 풍조가 확산됐다. 2009년 연쇄 살인범 강호순 사건을 계기로 특정강력범죄처벌 특례법이 개정돼 죄질이 흉악한 경우 신상 공개를 할 수 있지만 극히 예외적으로만 적용된다. 이러다 보니 범죄자가 옆집에 살아도 알기 어려운 세상이 됐다. 얼마 전 한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87%가 강력범죄 피의자 신상 공개에 찬성했다.
▷전남 신안군의 한 섬마을에서 초등학교 여교사를 집단 성폭행한 학부모 등 주민 3명의 죄질은 지면에 자세히 옮길 수 없을 만큼 악랄하고 뻔뻔하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 여교사의 삶과 인권을 짓밟은 범인들에 대한 국민의 공분도 크다. 그런데도 경찰은 강간치상 혐의로 오늘 검찰에 구속 송치하는 성폭행범들의 신상을 공개하지 않을 방침이다. 피의자 자녀 및 피해자 신상 노출을 막기 위해서라지만 이런 결정에 수긍할 국민이 얼마나 될까.
▷피해 여교사가 용기를 내 경찰에 고발함으로써 인면수심(人面獸心) 범죄에 대한 단죄가 가능해졌다. 도서벽지에 근무하는 여교사들의 열악한 현실도 국민이 알게 됐다. 반면 전남도교육청은 사건 당일인 지난달 22일 보고를 받고도 이달 3일 교육부에 늑장 보고했다. 사망 사고도 아니고 일과 후 발생한 일이어서 ‘보고 사안’으로 판단하지 않았다는 해명은 한심하다. 범인들에 대한 엄중한 처벌과 함께 도서벽지 여교사의 근무환경과 안전에 대한 실효성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