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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이 만난 사람/최영훈]“고경명 의병장의 순절 같은 호국영령의 영화 꼭 만들 터”

입력 | 2016-06-13 03:00:00

영화 감독 임권택




임권택 감독은 영화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평생 묵묵히 영화만 찍고 살았다. 요 몇 년간 새 작품을 내지 못한 그에게 슬럼프가 찾아온 걸까. 화순 적벽의 기를 받은 임 감독이 다시 기운을 내서 영화사에 남을 영화를 찍기 바란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최영훈 논설위원

임권택 감독(83)은 영화를 찍을 때 무서우리만치 몰입한다. 2002년 내놓은 ‘취화선’은 조선 말기의 천재 화가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1843∼1897)의 생애를 다뤘다. 이 영화 제작 전 임 감독은 서울 종로구 소격동의 한식집 ‘큰기와집’ 옆이 장승업 생가(生家)라는 말을 들었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까지 100번 넘게 그곳을 찾아 창가에 앉아 상념에 잠겼다. 그는 때로 흥행에 실패할지언정 영화의 완성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취화선은 그에게 세계적인 칸 영화제 감독상을 안겼다. ‘국민감독’이자 거장(巨匠)이라는 호칭을 거저 얻은 게 아니다.

1993년 ‘서편제’가 공전의 히트를 쳤을 때 임 감독과 술을 한잔했다. 꼭 23년 만에 다시 임 감독과 함께 전남 화순의 적벽(赤壁)과 담양의 문화유적을 다니는 1박 2일간 문화풍류 기행을 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아침에 그를 봤을 때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여행을 끝내고 닷새 전 다시 만났을 때 그의 몸은 그대로였지만 표정은 밝고 활기찼다. 화순 적벽에서 천제(天祭)를 지낸 뒤 임 감독은 저녁 자리에서 “백 살까지 (영화판에 현역으로) 남아 있을 기를 받았다”는 뜻을 어눌하게 피력한 바 있다.

“화순적벽 天祭의 감동 못잊어”

―조선 10경(景), 호남 제1경이 적벽이라는데요, 거기서 천제를 지냈지요.


조선 10경·호남 제1경으로 꼽히는 화순 적벽의 노루목 적벽 풍경.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젊은 시절 화순 적벽에 가본 일이 있습니다. 그때 이런 장엄한 곳인 줄 모르고 잉어 2마리를 잡아 매운탕을 끓여 먹고 돌아갔죠. 유건과 제복을 차려입고 천제를 치르니 그 감회가 이루 말로는 다할 수 없어요.”

임 감독은 천제를 지낸 일행 중 좌장(座長)으로 사실상 제주(祭主)다. 천제는 20년 가깝게 다산 선생의 추모제를 준비해온 차인(茶人) 한영용이 총괄 기획하고 30년 넘게 차를 공부한 김승희 김애숙 선생이 거들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천제는 생소한데요…


“저도 천제에 대해선 뭐가 뭔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늦은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산허리에 안개가 피어오르는 신비로운 적벽의 웅장함은, 참 뭐라고 필설로 형언하기 힘들 정도였답니다. 그때의 감동이 너무 생생해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언젠가 찍을 영화에서 감동을 피부에 와닿게 재현해낼 수 있을까 모르겠네요.”

이 땅에서 천제를 지내는 곳은 4곳이다. 태백산의 천제단과 강화도 마니산, 지리산의 노고단, 그리고 화순 적벽의 천제단. 3곳은 높은 산꼭대기이고, 적벽만 물가에 있다. 망향정에서 바라보면 천제단은 동복호 기슭의 태아가 엎드려 있는 듯, 건너편 노루목(장항) 적벽을 향해 돌출한 지형의 배꼽 자리에 위치해 있다.

―2014년 내놓은 ‘화장’이후 작품이 뜸한데….

“다음 작품으로 무엇을 할지 머릿속에 없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힘든 상황인 것 같아요. 그래서 나라를 위하고 고단한 서민에게 힘을 주는 그런 작품을 할 수 있다면, 희미하게 떠오르는 것이 있긴 한데 아직은 말하기가 좀….”

그 시절 모든 사람이 어려웠지만 임권택(경칭 생략)도 젊을 때 험하게 살았다. 7남매(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향은 전남 장성, 아버지를 비롯해 삼촌이 모두 좌익이었다. 한밤중 툭하면 형사들이 구둣발로 안방까지 들어와 벽장과 이불까지 뒤졌다. 그는 광주 숭일중 3학년 때 학교를 그만뒀다. 집을 나와 1951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막일을 하며 겨우겨우 살아남았다. 벌면 먹고, 못 벌면 굶고, 잠은 거리에서 해결했다.

노숙자들 사이에서 그는 인기가 ‘짱’이었다. “중학생 때 몇 번씩 읽었던 삼국지 수호지와 통속소설을 그들에게 들려주고 소주 한잔 얻어먹곤 했다. 이때 얻은 수전증으로 지금도 거동은 불편하다.” 그러나 수술이나 칼 대는 짓은 않고 불편하게 살겠다고 한다. 아마 불편한 몸이 그의 작품 활동에도 방해가 된 듯하다.

―‘서편제’로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렸는데….

“1962년에 감독으로 데뷔했습니다. 첫 작품인 ‘두만강아 잘 있거라’가 요즘 말로 대박이 났습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의기양양해 갔습니다. 광주의 흥행업자가 요정으로 데려갔는데 그때 처음 악사까지 여러 명 대동한 정식 판소리를 들었습니다. 흥행업자가 돈 자랑을 너무 하는 것 같아 비위가 상했지요. 그때 유명해지기 전이지만 곱사춤의 공옥진 선생도 처음 봤지요. 하지만 판소리는 왠지 마음에 울림이 남아 언젠가는 판소리 영화를 한번 해봐야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서편제’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는 데 본보도 기여했다. 중앙지 중 본보가 사회면에 임권택의 ‘서편제’를 맨처음 화제기사로 게재한 뒤 손님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최초의 서울 관객 100만 명 돌파 신기록도 세웠다. 앞서 ‘장군의 아들’ 1, 2편이 연속 흥행에 성공하자 이태원 태흥영화사 사장이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래서 “흥행은 절대 안 되겠지만 우리 것 한번 해 보겠다”고 하자 이 사장이 흔쾌히 승낙해 돈벌이와 무관하게 서편제를 찍을 수 있었다.

호국영령의 맑은 기운 느껴져…

―1박 2일 기행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나는 잘 울지 않습니다. 험한 일을 워낙 많이 당해서 그런지…. 그런데 이틀째인 5일 담양 고경명 선생의 12대 대종손의 생가를 갔을 때 사당(祠堂)에서 추념을 하고 춤꾼인 최용현(치과의사·살풀이춤의 대가 고 정재만 선생·무형문화재 보유자에게서 8년간 배움)의 살풀이춤을 보고 눈물이 났어요. 최 선생이 살풀이춤을 추다 보면 망자의 애환이 속에서 끓어오르는 경우가 많은데 고경명 선생을 추념하며 춤출 때는 아주 맑은 기운이 느껴졌다고 한 말이 너무 가슴에 다가왔답니다.”

임진왜란 때 전라도 의병장으로 6000명을 모아 의병 창의(倡義)를 했던 고경명 선생은 금산전투에서 왜적에게 패해 차남과 함께 순절했다. 대종가(大宗家)는 장손이 12대, 400년 가깝게 이어져야 붙여지는 명예로운 이름이다. 고경명 선생의 후예 고원희 대종손(75)은 눈빛이 형형했다. 사서삼경을 통달한 그의 기억은 비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작년 말부터 가슴을 앓는 지병이 도져 말이 잘 나오지 않는지 그저 눈으로만 답답함을 전했다. 임 감독을 비롯한 일행이 담양의 대종손 생가를 찾았을 때, 고씨 대종가의 어른들이 거의 다 모였다.

‘소년 임권택’의 100세 현역다짐

―고재유 전 광주시장과 중학 동기동창입니다.

“저는 광주 남구의 숭일중을 다녔지만 졸업은 못했습니다. 고경명 선생의 후예인 고재유 전 광주여대 총장과 몇 년 전 동창들과 함께 만났어요. 그때 고 총장이 ‘중학교 때 급장을 한 임 감독은 세계적인 감독이 됐는데, 나는 그 밑에서 부급장밖에 못해 국내의 조그만 지자체장만 했다’고 우스개를 한 기억이 납니다.”

두 사람은 담양과 장성에서 각자 광주 남구의 숭일중까지 도보로 통학을 했다. 광주의 남북에서 두어 시간을 걸어 학교 교문에 도착하면 지친 표정의 두 사람이 마주칠 때마다 미소짓곤 했다고 회고했다.

―고경명 선생 같은 의병장의 순절(殉節)에 관한 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으신지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의 얘기를 언젠가는 영화로 만들 겁니다. 제대로 만들려면 제작비가 엄청나게 들 텐데, 나같이 늙은 사람에게 누가 투자하려고 할지….”

그때 여든 셋의 ‘소년 임권택’은 수줍은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그는 눈이 맑고 순하다. 사슴의 눈처럼 슬픈 빛도 감돈다. 그는 1979년 마흔여섯에 늦깎이로 결혼했다. 신부는 당시 스물여덟의 꽃다운 여배우 채령이었다. 지금도 미모를 유지하고 있는 부인 채령을 1971년 제작한 무술영화 ‘요검’으로 처음 만났다. 당시 채령은 MBC 탤런트 공채 3기로 연기가 뭔지 모르는 햇병아리였다. 우여곡절 끝에 영화 제작을 마친 뒤 헤어졌다가 충무로 길거리에서 우연히 재회해 8년 열애 끝에 결혼했다.

―(부인에게) 광주 양림동 길거리에서 팬들이 몰려 감독님이 길을 못 갈 정도였는데요.

“그날 광주 사는 친지가 전화로 ‘임 감독이 광주에 왔다’고 전화를 해서 ‘화순 담양을 간다고 했는데 그럴 리 없다’고 했더니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사진이 떴다’며 보내더군요.”

부인이 웃으면서 임 감독에게 “그렇게 인기가 많으니 광주 가서 사세요”라고 농담을 건넸다. 그러자 임 감독은 천진한 표정으로 “고민을 해보겠다”고 화답했다. 17년 연하의 부인이 이제 거동이 불편한 그의 보호자가 된 것 같다.

임 감독이 100세까지 영원한 현역으로 영화사에 남을 좋은 영화를 몇 편 더 찍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만드는 눈물이 찔끔 나는 그런 영화를 말이다.

최영훈 논설위원 tao4@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