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길재 북한대학원대 교수 전 통일부 장관
이러한 갈등 프레임은 민주화 진전과 더불어 사방으로 확산됐고, 외교안보를 넘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영역에서 뿌리 내렸다. 이제는 대북정책 영역의 갈등이 다른 영역으로 퍼져 나간 것인지, 아니면 원래 존재했던 갈등이 대북정책에서 첨예화되어 분출됐던 것인지도 모호하고, 그것을 따진다는 것조차 별 의미가 없을 정도로 고질적인 상태가 돼버렸다.
인류 문명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진보하고 있다. 국가 간 관계도 기존 지식으로는 설명하기 어렵고, 각국의 국내 정치도 어디로 튈지 알 수가 없다. 인류와 세계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불확실성을 걱정하고, 그래서 더욱더 우리 공동체가 직면한 위기상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대북·통일정책은 그 어떤 정책보다 이 세 가지 덕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장기간을 내다보고 추진해야 하는 사안인 데다, 북한이라는 직접 상대가 있고, 강대국들도 밀접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정권마다 정책이 바뀌고, 사회 내에서 정책을 놓고 분열하면서 서로 다른 얘기를 국제사회에 전하게 되면 정책은 휘둘리기 쉽다. 통일은 더 요원해진다.
이 갈등구조를 혁파하기 위해서는 보수가 먼저 나서야 한다. 대북·통일정책에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내는 데 앞장서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보수는 어떤가. 통일문제가 민족문제이고, 우리가 당사자라는 인식이 희박해지고 있다. 안보의 복합성을 고려하여 안보를 실질적으로 강화하려는 노력 대신에 ‘안보지상주의’ 논리만 내세운다.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평화통일 추구’를 너무 쉽게 비현실적이라고 얘기한다. 대북 우월감을 과시하면서도, 늘 북의 ‘적화통일’ 야욕에 취약한 한국 사회를 걱정하는 이율배반을 드러낸다. 통일이야말로 공동체의 미래를 좌우하는 일임을 역설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릇 보수가 취해야 할 최고의 가치인 국민통합을 추구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한다.
이러한 모습은 보수의 것이 아니라, 수구의 것이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데 급급한 수구는 편 가르기를 통해 늘 분열을 획책한다. 내 생각만 옳다는 우월주의에 빠져 상대방의 견해에 재갈을 물리려고 한다. 오직 경직만 있다. 보수는 이제 수구의 모습을 떨쳐내야 한다.
한국의 보수는 미중 데탕트와 월남전 종결이라는 국제 환경의 급변 속에서 국가 이익을 위해 전략적인 관점에서 남북대화를 시작했고 7·4남북공동성명을 채택했다. 탈냉전 초기인 1989년에는 지금도 유효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1991년에는 통일장전이라고 할 수 있는 ‘남북기본합의서’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노선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로 계승되었다. 대화와 교류·협력을 통한 평화통일, 당사자 원칙, 민족 동질성 회복 등 대북정책의 기조는 바로 보수가 주도해서 만든 것이다.
류길재 북한대학원대 교수 전 통일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