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이산가족찾기 뒤 새 이름 얻어… 33년간 韓日 오가며 지갑 슬쩍 수십개 스카프는 범행 은폐 수단
“사람 잘못 봤다. 나는 김 씨야. 당신들이 잡으려는 조○○가 아니라고.”
10일 경기 고양시의 한 주택가에 살고 있는 김모 씨(73)는 체포 영장을 들고 온 경찰에게 소리쳤다. 억울하다며 김○○로 된 신분증까지 보여줬다. 하지만 경찰은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수갑을 채웠다. 33년 동안 두 개의 이름으로 소매치기와 멋쟁이 할머니로 번갈아 살아온 김 씨의 ‘이중생활’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일곱 살이던 6·25전쟁 때 부모와 헤어진 김 씨는 보육원에서 조○○라는 이름으로 자랐다.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다 16세 때 소매치기 기술을 배우면서 일찍 범죄의 길로 빠졌다.
이후 그는 소매치기 인생의 황금기를 보냈다. 서울 남대문시장은 그의 주요 범행 장소였다. 경찰에 붙잡힐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두 개의 이름을 번갈아 사용해 무거운 형을 피했다. 그는 1992년부터 2004년까지 50여 차례에 걸쳐 일본으로 원정 소매치기도 다녀왔다. 그는 4인조 일본 원정 소매치기단의 우두머리를 맡을 정도로 손기술이 뛰어났다. 그는 항상 범행을 할 때 스카프를 매고 있었다. 스카프는 가방에 손을 넣고 지갑을 빼내는 장면을 가리는 범행 도구였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주위 사람들은 그를 스카프로 멋 내기 좋아하는 평범한 할머니로 기억했다. 그의 집에서는 수십 개의 스카프가 나왔다.
나이가 들면서 한동안 조용히 지내던 그는 3월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에서 옷을 구경하던 피해자 이모 씨(63)의 가방에서 현금 60만 원이 든 지갑을 훔치면서 꼬리가 잡혔다. 이후 경찰을 피해 숨어 지내던 김 씨는 수중에 돈이 다 떨어지자 원래 자신이 살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기초생활수급비를 받기 위해서였다.
경찰은 소재조차 파악되지 않던 김 씨가 기초생활수급비를 신청하자 구청 직원으로 위장해 검거하게 됐다. 경찰 관계자는 “73세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움직임이 민첩하다”며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맨손으로만 소리 내지 않고 지퍼를 열고 닫는 신기에 가까운 손기술을 가졌다”고 전했다. 서울 남대문경찰서는 전과 38범인 김 씨를 상습절도 혐의로 구속했다고 16일 밝혔다.
김단비 기자 kubee08@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