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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기대 안한 폐고분서 국내 최초로 토용 수십점 발굴

입력 | 2016-06-16 03:00:00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10>경주 용강동 석실분 발굴, 조유전 前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조유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이 지난달 25일 경북 경주시 용강동 고분을 30년 만에 다시 찾았다. 1986년 발굴 당시 봉분 위를 덮었던 쓰레기와 흙을 걷어내고 석축을 조사하고 있다(아래 사진). 경주=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아이고 망측시러버라. 뭐 이래 생긴 게 여깄노….”

1986년 7월 18일 경북 경주시 용강동 고분 발굴 현장. 한 대학원생이 흙이 잔뜩 묻은 조각상 하나를 조유전 당시 경주고적발굴조사단장(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74)에게 가져오자 이를 본 인부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조유전과 발굴단원들의 표정에도 당혹감이 떠올랐다. 누가 봐도 전형적인 남근(男根) 형상이었다. 신성한 무덤에 남근상이라니 무슨 조화란 말인가….

호기심에 서둘러 흙을 닦아 낸 단원들은 조각상의 실체를 접하고 더 놀랐다. 남근이 아니라 얼굴 없는 여인의 전신상이었다. 진흙에 뒤덮이는 바람에 여인상을 남근상으로 오인하는 촌극을 빚은 것. 한국 고고 발굴 역사에서 최초로 발견된 토용(土俑·인물이나 동물을 흙으로 구워 만든 것)이었다.

○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지난달 25일 30년 만에 용강동 고분을 다시 찾은 조유전은 “여기가 발굴했던 그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많이 변했다”고 말했다. 국가사적 제328호로 지정돼 깔끔하게 복원 정비된 고분 주변은 온통 아파트 숲이었다. “예전에 논밭투성이였어요. 집은 고작해야 두세 채 있었을까. (고분을 가리키며) 여기는 그야말로 쓰레기장이었지.”

조유전은 1986년 6월 16일 이원홍 문화공보부 장관의 지시로 용강동 고분 발굴을 시작했다. 앞서 경주 지역 향토사학자들의 모임인 신라문화동인회의 요청을 계기로 정양모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장이 발굴을 건의했다. 그는 고분을 보자마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주민들이 버린 쓰레기 더미가 쌓인 봉분 위로 오래전 심은 소나무 한 그루가 덩그러니 자라고 있었다. 봉토는 여기저기 파였고, 외곽 둘레돌(호석)은 상당수가 뽑혀 나가 집 정원 장식용 등에 쓰였다. 무엇보다 봉분 표면에 여러 개의 도굴 흔적이 뚜렷했다. 높이가 10m가 넘는 데다 거대한 돌무지가 쌓여 있는 적석목곽분과 달리 용강동 고분과 같은 돌방무덤(석실분)은 약 3m 높이로 규모가 작아 도굴 피해가 극심했다. 이미 수차례 도굴을 당한 폐고분이 분명해 보였다. ‘과연 여기서 유물이 나올까….’ 신라 왕경 유적 발굴로 시간에 쫓기던 조유전은 내심 “빨리 끝내자”고 생각했다.

경북 경주시 용강동 고분에서 출토된 통통한 얼굴의 여인 토용(왼쪽 사진)과 서역(아라비아)인의 얼굴을 가진 남성 토용. 이들 토용은 신라가 당나라, 실크로드와 교류한 흔적을 담고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하지만 꺼진 불도 다시 보자고 했던가. 발굴에 착수한 지 한 달 만에 발견된 토용으로 나른했던 현장에 느닷없이 비상이 걸렸다. 조유전은 단원들에게 “여인상의 머리를 반드시 찾아내라”는 특명을 내렸다. 시신이 안치된 현실(玄室)과 연도(羨道·고분 입구와 현실을 연결하는 통로)를 가득 채운 돌과 흙무더기를 일일이 채질하고, 시신 받침대(시상)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여인상의 머리는 끝내 나오지 않았지만, 그 대신 시상 앞 남측 방향에서 채색된 인형(人形) 토용 28점과 말 모양 토용 4점, 토기(土器) 15점 등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현실 벽면을 따라 청동으로 만든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7점도 함께 출토됐다. 신라의 매장문화를 해석할 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가 대거 발굴된 것이다.

○ 실크로드 문명 교류의 흔적

고고학계는 용강동 고분을 신라의 대외 문화 교류사를 푸는 핵심 열쇠라고 본다. 토용의 외형과 복장에서 당나라와 실크로드 문화의 영향이 물씬 풍기기 때문이다. 조유전이 용강동 고분에서 최고로 꼽는 서역(아라비아)풍의 인물 토용도 그런 맥락에서 읽힌다.

“턱수염이 수북한 이 토용은 언뜻 봐도 우리 조상이 아니에요.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이 사람이 신라 귀족의 호위무사가 된 외국 용병이 아닐까 상상합니다. 당시 순장(殉葬) 대신 인형으로 주인 곁을 지킨 게 아닐까….”

통통한 얼굴형의 여성을 선호한 당나라의 영향으로 용강동 고분에서 발견된 여인 토용은 한결같이 후덕한 인상이다. 복색도 당풍(唐風)이 뚜렷이 반영돼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진덕여왕 3년(649년) 중국의 의관을 받아들였고 문무왕 4년(664년) 부인들의 의복도 중국식으로 바꾼다. 이에 따라 고고학계는 이 무덤이 신라가 당나라 복식을 채용한 7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고고학)는 “중국식 의복을 받아들인 연대가 사서에 명확히 기록된 만큼 용강동 고분은 신라 후기 석실 고분과 토기의 연도를 추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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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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