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10>경주 용강동 석실분 발굴, 조유전 前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조유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이 지난달 25일 경북 경주시 용강동 고분을 30년 만에 다시 찾았다. 1986년 발굴 당시 봉분 위를 덮었던 쓰레기와 흙을 걷어내고 석축을 조사하고 있다(아래 사진). 경주=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1986년 7월 18일 경북 경주시 용강동 고분 발굴 현장. 한 대학원생이 흙이 잔뜩 묻은 조각상 하나를 조유전 당시 경주고적발굴조사단장(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74)에게 가져오자 이를 본 인부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조유전과 발굴단원들의 표정에도 당혹감이 떠올랐다. 누가 봐도 전형적인 남근(男根) 형상이었다. 신성한 무덤에 남근상이라니 무슨 조화란 말인가….
호기심에 서둘러 흙을 닦아 낸 단원들은 조각상의 실체를 접하고 더 놀랐다. 남근이 아니라 얼굴 없는 여인의 전신상이었다. 진흙에 뒤덮이는 바람에 여인상을 남근상으로 오인하는 촌극을 빚은 것. 한국 고고 발굴 역사에서 최초로 발견된 토용(土俑·인물이나 동물을 흙으로 구워 만든 것)이었다.
지난달 25일 30년 만에 용강동 고분을 다시 찾은 조유전은 “여기가 발굴했던 그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많이 변했다”고 말했다. 국가사적 제328호로 지정돼 깔끔하게 복원 정비된 고분 주변은 온통 아파트 숲이었다. “예전에 논밭투성이였어요. 집은 고작해야 두세 채 있었을까. (고분을 가리키며) 여기는 그야말로 쓰레기장이었지.”
조유전은 1986년 6월 16일 이원홍 문화공보부 장관의 지시로 용강동 고분 발굴을 시작했다. 앞서 경주 지역 향토사학자들의 모임인 신라문화동인회의 요청을 계기로 정양모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장이 발굴을 건의했다. 그는 고분을 보자마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주민들이 버린 쓰레기 더미가 쌓인 봉분 위로 오래전 심은 소나무 한 그루가 덩그러니 자라고 있었다. 봉토는 여기저기 파였고, 외곽 둘레돌(호석)은 상당수가 뽑혀 나가 집 정원 장식용 등에 쓰였다. 무엇보다 봉분 표면에 여러 개의 도굴 흔적이 뚜렷했다. 높이가 10m가 넘는 데다 거대한 돌무지가 쌓여 있는 적석목곽분과 달리 용강동 고분과 같은 돌방무덤(석실분)은 약 3m 높이로 규모가 작아 도굴 피해가 극심했다. 이미 수차례 도굴을 당한 폐고분이 분명해 보였다. ‘과연 여기서 유물이 나올까….’ 신라 왕경 유적 발굴로 시간에 쫓기던 조유전은 내심 “빨리 끝내자”고 생각했다.
경북 경주시 용강동 고분에서 출토된 통통한 얼굴의 여인 토용(왼쪽 사진)과 서역(아라비아)인의 얼굴을 가진 남성 토용. 이들 토용은 신라가 당나라, 실크로드와 교류한 흔적을 담고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 실크로드 문명 교류의 흔적
“턱수염이 수북한 이 토용은 언뜻 봐도 우리 조상이 아니에요.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이 사람이 신라 귀족의 호위무사가 된 외국 용병이 아닐까 상상합니다. 당시 순장(殉葬) 대신 인형으로 주인 곁을 지킨 게 아닐까….”
통통한 얼굴형의 여성을 선호한 당나라의 영향으로 용강동 고분에서 발견된 여인 토용은 한결같이 후덕한 인상이다. 복색도 당풍(唐風)이 뚜렷이 반영돼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진덕여왕 3년(649년) 중국의 의관을 받아들였고 문무왕 4년(664년) 부인들의 의복도 중국식으로 바꾼다. 이에 따라 고고학계는 이 무덤이 신라가 당나라 복식을 채용한 7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고고학)는 “중국식 의복을 받아들인 연대가 사서에 명확히 기록된 만큼 용강동 고분은 신라 후기 석실 고분과 토기의 연도를 추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9회]아홉달 애태운 접시 반쪽 찾은 날 ‘기쁨의 회식’
[8회]1978년 미군 병사가 주운 돌, 세계 고고학계 발칵 뒤집어
[7회]30t 심초석 들어올리자 생각도 못한 유물 3000점이 우르르
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