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이국언 ‘근로정신대 시민모임’ 대표
이국언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상임대표가 14일 양금덕 할머니 등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들과 일본 시민단체가 일본에서 미쓰비시를 상대로 10년간 소송을 벌인 기록을 담은 책 ‘법정에 새긴 진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지난달 출간됐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봉투 뒷장에는 ‘서명 용지를 늦게 보내 미안하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글을 쓴 김모 씨는 당시 한신대 신학대학원 여학생회 총무를 맡고 있었다. 김 씨는 원우회 회원 200명 중 136명에게 근로정신대 할머니에 대한 미쓰비시중공업의 사죄를 촉구하는 서명을 받았다. 그는 최근 이삿짐을 꾸리다 서명 용지가 든 봉투를 발견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마음을 담은 글과 함께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한을 풀고 미쓰비시의 진정한 사죄를 받아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각오도 적었다.
이국언 시민모임 상임대표(48)는 “김 씨 같은 시민들의 관심이 평생 한을 안고 살아 온 할머니들에게 절반의 미소를 찾아 줬다”며 “할머니들의 꿈 많은 소녀 시절을 혹독한 노동으로 앗아간 전범 기업 일본 미쓰비시의 사죄를 받아 나머지 미소를 되찾아 주고 싶다”고 했다.
할머니들은 가슴에 한이 맺혔지만 포기하고 숨어 살았다. 소녀 시절 강제 노역의 아픔은 머리카락이 백발이 되고,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파여도 잊혀지지 않았다. 할머니들은 30년 전 양심적인 일본 시민단체인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를 지원하는 모임’ 회원들이 찾아와 사죄하자 처음에는 이게 진심인지 싶었다. 하지만 그들의 진정성을 알고는 시민단체 회원들과 30년 지기 친구가 됐다.
14일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사무실에 도착한 우편봉투에 적힌 글. 우편봉투에는 7년 전 미쓰비시중공업의 사죄를 촉구하면서 받은 서명지가 들어있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시민모임 활동의 중심에는 항상 이 대표가 있었다. 전남 영암 출신인 그는 광주 광덕고와 조선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2003년부터 6년 동안 인터넷 매체와 주간지에서 기자로 일했다. 2005년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사연을 처음 접하고 ‘역사책에만 있는 줄 알았던 일제 강제 동원 피해자들이 내 주변에 있었구나’ 하며 놀랐다. 이들을 취재하면서 ‘빼앗긴 청춘 돌아오지 않는 원혼’이라는 강제 동원 피해자 구술집을 펴냈다. 평생 외롭게 살아 온 할머니들의 눈에서 의지하고 기대려는 마음을 봤다. 당시 할머니들의 유일한 조력자는 대한해협 건너의 일본 시민단체뿐이었다. 일본 시민단체는 2005년 나고야 지방법원에서 1심 소송이 패소하자 옛 광주 남구청사로 할머니들을 불러 사죄했다. 양심적인 일본 시민들의 행동은 감동을 줬지만 한국에서는 누구 하나 나서 김치찌개 한 그릇 대접하지 못했다.
“할머니들의 눈빛을 외면하기 힘들었습니다. 기사 한 줄보다 할머니들에게 보탬이 되는 시민단체가 결성돼야 한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이 대표는 2009년 3월 한국에서도 할머니들의 사연을 알리고 지원하는 단체가 절실하다는 것을 느끼고 시민모임을 결성했다. 이후 시민모임은 2009년 10월부터 2010년 7월까지 광주 서구 상무지구 미쓰비시자동차 판매점 1인 시위를 208차례 벌이고 시민 13만5000명의 항의 서명을 받았다. 김 씨가 뒤늦게 보낸 136명의 서명용지도 여기에 추가됐다.
시민모임이 1인 시위를 벌이던 중에 일본 사회보험청이 근로정신대 할머니 7명에게 후생연금 99엔을 지급한다는 사건이 터져 공분을 샀다. 각계의 거센 비난에 미쓰비시중공업은 협상에 나섰다. 하지만 2010년 11월부터 1년여 동안 진행되던 협상은 16번째 회의를 끝으로 결렬됐다. 협상 결렬에도 다행히 한국 대법원은 강제 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전범 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이 가능하다고 판결했다.
양 할머니 등 피해자 5명은 2012년 광주지법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이어 지난해 광주고법에서도 승소해 현재 재판은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다른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 6명은 2014년과 2015년 추가 소송을 제기했다. 잇따른 소송 제기에 미쓰비시는 ‘법원 주차장이 협소하니 대중교통을 이용해 달라는 문구가 일본어로 번역되지 않았다’ 등의 각종 핑계를 대며 서류 접수를 거부하고 있다.
이 대표는 미쓰비시를 변호하는 법무법인 김앤장과 외교부가 방관을 넘어 미쓰비시의 등을 두드려 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대법원이 판단을 늦추는 것도 못내 불안하다. 할머니들이 대법원에서 승소하면 미쓰비시가 한국 시장을 포기할 수 없어 협상에 다시 나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일본 시민단체 회원 1100여 명은 1986년 결성된 뒤 10년 동안 소송을 진행하는 등 할머니들을 돕는 질긴 싸움을 하고 있다. 시민모임 회원 850명도 근로정신대 문제를 한국에서 이슈화하고 지원했다. 이들은 한일 양국에 긍정적 힘을 확산시킨 주역들이다.
“한일 양국 시민들이 힘을 보탠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싸움은 시민운동의 모델이 될 것입니다. 시민운동은 역사에서 무엇을 얻고 남길 것인가라는 화두와 함께 작지만 소중한 감동을 줬습니다. 그 감동의 불씨를 살리고 승화시키는 게 제 역할이죠.”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