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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하지 않은 삶’은 없다… 학생들이 엮어낸 어르신들의 자서전

입력 | 2016-06-20 03:00:00


○ 경기도 화성 어촌마을 17명 “살아온 세월이 아파서… 매일 울었지”

17일 경기 화성시 서신면 서신농협에서 열린 ‘백미리 자서전’ 출판기념회에서 어르신들과 계원예술대 학생들이 자서전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계원예술대 학생들은 4개월간 화성시 백미리 주민 17명을 인터뷰해 만든 자서전 17권을 인터뷰한 주민들에게 이날 전달했다. 화성=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흑백사진 속 김상용 씨(69)의 오른손 약지는 새끼손가락만큼 짧았다. 젊은 날 상경했다가 잇따른 실패로 고향에 돌아온 어느 가을, 콩을 털다가 손이 기계에 빨려 들어갔다. 뼈가 부서졌지만 일을 멈출 수 없어 병원은 가지 못했다. 김 씨는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14세부터 밭일, 술장사, 성냥장사, 비누장사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손등의 거친 주름과 굵어진 손가락 마디가 그 증거였다. 고된 노동의 후유증 탓에 김 씨는 오른 손가락 3개, 왼 손가락 4개를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

올 3월 15일 김 씨가 사는 경기 화성시의 작은 어촌 마을인 백미리에 낯선 손님들이 찾아왔다. 김 씨 등 백미리 주민 17명의 자서전을 편찬하는 ‘백미리 자서전’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계원예술대 광고브랜드디자인과 학생들과 교수들이었다.

처음에 “나는 지금껏 내 이야기를 남들한테 해본 적이 없다”고 멋쩍어하던 김 씨는 시간이 지나면서 아내를 처음 만난 날의 설렘, 홀어머니가 치매에 걸린 날의 충격 등 69년간 살아온 이야기를 손자·손녀뻘 학생들에게 하나씩 털어놓았다.

17일 화성시 서신농협에서 백미리 자서전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4개월 동안 학생들이 인터뷰한 어르신 17명의 사연이 담긴 자서전 17권이 이날 공개됐다. 자서전 표지에는 어르신들의 사진과 이름이 각각 큼직하게 인쇄돼 있었다. 학생들은 그동안 자신이 인터뷰했던 어르신들에게 자서전을 전달했다. 김 씨는 “학생들이 나를 찾아온 그날 이후 매일 눈물을 흘렸다”고 말하며 또 눈시울을 붉혔다.

시신 염습하는 일을 했던 한광은 씨(80)는 자서전을 가슴에 품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일찍 아버지와 형을 잃었지만 시신 수습을 제대로 하지 못한 한이 남아 모두가 마다하는 그 일을 떠맡았던 한 씨다. 오래전에 일을 그만뒀지만 자서전에는 평생 ‘염장이’로 살아온 한 씨의 이야기가 세세하게 담겨 있었다.

학생들은 “자서전을 쓰는 게 쉽지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경기 의왕시에 있는 학교에서 백미리까지는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2시간 넘게 가야 했다. 바쁘다며 인터뷰를 거절하거나 ‘영혼이 빠져나간다’며 사진 찍기를 꺼리는 어르신도 있었다. 학과 대표 신봉천 씨(23)는 “과제를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점점 만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백미리 어르신들이 우리 할아버지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프로젝트를 지도한 강윤주 교수는 “백미리 자서전을 시작으로 올해 2학기에는 백미리에 ‘커뮤니티디자인센터’를 세우고 이곳에서 커피와 학생들이 만든 디자인 제품을 판매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 80대 참전용사 4명 “6·25 전우들의 희생정신 기리는 계기되길”

한민高 18명이 인터뷰해 출간

한민고 학생들이 6·25전쟁 참전용사인 김구현 옹(앞줄 가운데)을 인터뷰한 뒤 찍은 기념사진. 앞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배민혁, 조예은, 이승희, 박소혜 학생. 육군 제공

군인 자녀 기숙형 사립학교인 한민고등학교 학생들이 6·25전쟁 참전용사 4명의 육성이 담긴 자서전을 최근 발간했다.

배민혁 군을 비롯한 한민고 3학년 학생 18명이 ‘6·25전쟁 참전용사 자서전 제작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은 지난해 6월 초. 더 늦기 전에 이들의 생애를 기록으로 남겨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하자는 김형중 교사의 제안으로 첫발을 뗐다.

배 군 등은 우선 관련 사료(史料)와 영화, 소설 등을 통해 6·25전쟁의 구체적 내용을 파악한 뒤 학교 인근 마을 관계자들의 추천을 받아 조선영(89), 장오봉(86), 김구현(85), 엄봉용 옹(82)을 인터뷰 대상자로 선정했다. 이후 학생들은 두 달여간 일요일마다 참전용사들을 찾아가 인터뷰를 했다.

처음에는 ‘할 말이 뭐가 있겠느냐’며 고사하던 참전용사들은 학생들의 요청이 거듭되자 당시의 상황을 자세하게 회상했다.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거나 전우들을 떠나보낸 순간을 얘기하다 눈시울을 붉히는 참전용사들의 모습에 배 군 등은 감동을 받았다고 전했다.

고령인 참전용사들은 건강이 좋지 않을 때에는 누워서 인터뷰를 진행하거나 인터뷰 일정을 미루기도 했다. 일부 참전용사는 “반드시 건강을 되찾아 인터뷰를 마칠 테니 자서전을 꼭 마무리해 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총 100부가 인쇄된 자서전에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학생들의 소감문도 함께 수록됐다. 학생들은 19일 “6·25전쟁을 겪으신 모든 참전용사에 대한 헌사를 담고 싶었다”며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나라사랑 정신을 결코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화성=이호재 기자 ho@donga.com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ysh100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