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사-밴사 보전액 합의 못해… 단말기 프로그램 교체 지지부진
“아직도 다 서명을 받아요. 손님이 서명을 안 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질 않도록 돼 있거든요.”
20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에 위치한 A식당. 계산대 앞에 서 있던 종업원 정모 씨(48·여)는 ‘카드 결제를 할 때 아직도 손님의 서명을 받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같이 말했다. 식사를 마친 남성 3명이 2만4000원을 카드로 결제하고 막 가게를 나간 뒤였다. 정 씨에게 ‘5만 원 이하 무서명 신용카드 거래’를 아느냐고 묻자 고개를 가로저으며 “처음 듣는다”고 답했다.
지난달 1일부터 5만 원 이하의 금액을 카드로 결제할 때는 따로 서명을 하지 않아도 되는 무서명 신용카드 거래가 시행됐다. 하지만 20일 동아일보가 명동 한복판에서 영업 중인 커피숍 식당 빵집 생활용품점 등 10곳을 둘러본 결과 실제로 무서명 거래가 이뤄지고 있는 곳은 단 2곳에 불과했다. 그나마 2곳 중 1곳은 2주 전 가게를 찾았을 땐 금액에 상관없이 무조건 서명을 받았었다.
카드사와 가맹점 사이에서 결제 대행을 해주는 밴(VAN)사는 단말기 프로그램의 문제 때문에 무서명 신용카드 거래가 지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 밴사 관계자는 “현재 대부분의 가맹점들이 이용하고 있는 단말기는 서명을 하지 않으면 결제 자체가 되지 않도록 프로그램이 짜여 있다”며 “이를 바꾸기 위해선 프로그램을 교체해야 하는데 이 프로그램 개발이 아직 다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업계에선 빨라도 다음 달이 돼야 프로그램 개발 작업이 마무리될 것으로 보고 있다.
문제는 카드 가맹점들도 이런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 중구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는 오모 씨(69·여)는 “밴사로부터 단말기 프로그램을 바꿔야 한다는 안내는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단순히 프로그램의 문제보다 업계의 이해관계 때문에 무서명 거래의 도입이 늦어지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현재 밴사는 밴대리점에 단말기 설치 및 수리 등을 맡기고 밴대리점은 전표 매입 수수료(건당 30∼40원) 등을 받아 수익을 올린다. 하지만 5만 원 이하 무서명 거래를 시행하면 전표를 수거하지 않아도 돼 전표 매입 수수료가 크게 감소한다. 금융위원회가 카드사와 밴사에 줄어드는 밴대리점의 수수료 일부를 보전해 주라고 했지만 이를 얼마나 어떻게 보전해 줄지에 대해선 아직 합의가 되지 않고 있다. 카드업계 관계자는 “수수료 분담률이 결정이 안 되면서 단말기 프로그램 개발도 늦어지고 있다”며 “카드사와 밴사, 밴대리점이 계약을 마무리하면 단말기 교체 작업은 빨리 진행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충분한 준비 없이 성급하게 무서명 거래를 시행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이어지고 있다. 한 카드사 관계자는 “전표 매입 수수료 등에 대해 업계에서 구체적인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는데도 정부 눈치를 보느라 시행을 서두른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가맹점의 소비자에 대한 본인 확인 의무는 5월부터 면제해 주고 있다”며 “그런 의미에서 무서명 거래는 사실상 시행 중”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