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우의 ‘이별 택시’
김창기 전 동물원 멤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택시가 안 잡혀서, 그녀는 발을 동동 구릅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빈 택시가 내 앞에 섭니다. 기사 아저씨가 “탈 거요, 말 거요?” 하는 피곤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봅니다. 얼떨결에 올라탑니다. 나는 착한 아이니까요. 타고 나니까 ‘어, 이것이 마지막인데, 다시는 만날 수 없는데!’ 하고 깨닫게 됩니다. 뒤를 돌아보지만, 이미 그녀는 떠났고 없습니다. 뿌연 김이 서린 차창을 닦아내니, 울고 있는 나의 모습이 보입니다.
기사 아저씨가 어디로 가냐고 합니다. 모르겠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미친 사람처럼 보일 것입니다. ‘찌질’합니다. 입을 꽉 다문 아저씨를 대신해서 와이퍼가 뽀드득거리며 신경질을 내줍니다. 한심합니다.
치명적인 상실을 경험할 때, 우리는 처음에는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릅니다. 우왕좌왕하다가, 이렇게 하면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간절한 희망을 가지고 운명과 흥정을 시도하죠. 하지만 흥정은 내가 좋은 카드를 쥐고 있을 때에나 내 편입니다.
그래서 그다음에는 현실을 부정하고 외면하려 하고, 그래도 안 되니까 나를 이렇게 고통 속으로 밀어 넣은 대상에게 분노합니다. 그래도 안 되기에, 결국 스스로에게 분노하고 자책하며 우울해집니다. 그것이 청춘의 이별이든, 성취든, 인간관계든, 삶의 의미든, 상실을 극복하는 과정은 다 비슷하죠. 당신은 그 과정 어디쯤에 있나요?
바랄 수 있다면, 그 과정을 겪는 동안 곁에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주는 것이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떤 말도 크게 소용이 없으니까요. 원초적인 고통의 과정을 통과하는 데, 이성은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랄을 하는 나를 견뎌준 그 대상을 통해, 다른 길은 없고, 죽을 것 같아서 택시에서 내리면, 대부분의 경우 다시 택시를 탈 수 있는 차비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내가 그 덕을 봤다면, 나도 그렇게 베풀어줘야 합니다.
올해 장마엔 한 달 동안 비가 꽤 내릴 거랍니다. 저는 벌써 관절이 걱정됩니다. 하지만 우울해지거나 기죽을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리 지겨워도 장마는 끝날 것이고, 그 비가 그치고 나면, 시원한 빗줄기를 그리워하게 할 뜨거운 태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삶의 많은 일처럼, 그 뜨거운 여름 또한 결국 지나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