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김희균 기자
1993년 1월 10일자 동아일보를 보면 국립교육평가원(당시 수능 주관 기관)이 설명한 수능의 성격은 다음과 같다.
‘단편적인 지식의 암기 수준에 머물지 않고 자료의 해석, 원리의 응용, 현상이나 사실에 대한 논리적 분석과 판단 등 사고력을 요구하는 문제를 출제한다.’
수능 2년 차인 나로서는 당시 이런 설명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 사회탐구 영역에서는 암기한 배경 지식이 없더라도 문제에 제시된 도표나 지도를 해석하면 풀 수 있는 신유형이 등장했다. 언어 영역에서는 교과서 이외의 지문이 많이 출제돼 평소 문제집 대신 문학전집이나 시집을 끼고 살던 친구들이 높은 점수를 받기도 했다.
물론 교과서를 성실히 외워도 시험을 준비하기 어렵다는 불만과 우려도 있었다. 이에 대해 국립교육평가원은 오히려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지금까지의 암기 위주 학습 방법으로 대비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 시험의 기대효과다. 고교 교육 정상화에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수능을 들여다보면 과연 당시 대대적인 투자와 연구를 감수하고 새로운 대입시험을 도입한 취지가 살아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하지만 EBS 연계 정책만큼은 후퇴한 정책이다. 수능이라는 제도 자체를 잘 만들어보겠다는 본질적인 목표가 아니라, 사교육을 줄여보겠다는 부수적인 목표가 우선 작용한 탓에 부작용이 생겼다. 이명박 정부는 수능에 EBS를 연계한 이후 대형 인터넷 강의 업체들의 매출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정책 목표를 달성했다고 기뻐했다. 2011학년도부터는 수능과 EBS의 연계율을 무려 70%로 확대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이제 학생들은 ‘수능 공부=EBS 교재 암기’라고 생각한다. 고3은 물론이고 1, 2학년 교실에서조차 교과서는 EBS 교재에 떠밀려 쫓겨났다.
수능 난이도를 따질 때도 문항의 질은 중요치 않다. EBS 교재의 흔적이 얼마나 나왔느냐가 학생들의 체감 난이도를 가른다. 6월 수능 모의평가에서도 보듯 학생들은 EBS 교재 밖에서 지문이 많이 나오면 일단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EBS 연계율이 70%에 달하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문제 풀기가 어려워졌다는 지적도 있다. 출제진 입장에서는 나머지 30%에서 변별력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일부 문항을 지나치게 꼬고 비튼다는 지적이 나온다. 2년간 육아휴직을 하고 올해 복직한 한 고교 국어 교사는 “예전에는 수능 문제지를 슥 훑어보면 대부분 답이 바로 나오고 난이도도 가늠할 수 있었는데 이번에 6월 모의평가 문항을 보니 풀기가 쉽지 않더라”면서 “EBS 교재 외의 지문들을 보면 고교생 수준에서는 너무 어렵거나 쓸데없이 긴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문제은행 방식인 미국 수능(SAT)과 달리 우리나라 수능은 매년 대규모 인력을 투입해 새로 출제하는 이유에 대해 교육 당국은 “우리나라의 과도한 입시열을 감안하면 문제은행 방식으로 운영할 경우 수험생들이 기출 문제를 몽땅 외워 버리는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한다. 그러나 EBS 연계가 누적되면서 사실상 EBS 자체가 거대한 문제은행이 돼 버렸다.
김희균 기자 foryo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