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포만호성은 이순신이 수군 초급장교가 된 후 처음 부임해 수군들을 지휘하던 곳이다. 현재 남쪽을 제외하고 성벽이 복원됐고, 그 아래로 작은 정원도 조성됐다. 성곽 아래로 발포 앞바다가 내려다보인다. 고흥(전남)|김진환 기자 kwangshin00@donga.com
■ 7. 도화면 발포리, 이순신의 흔적
세밀한 생활사와 풍속사 혹은 세상의 어긋난 도리에 대한 풍자.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동안 윤색과 와전의 과정을 거치기도 하지만 그나마도 이야기를 낳은 공간에서 나고 자란 어르신들의 입이 아니라면 들을 수 없다. 콘텐츠로서 다양한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대, 본래의 설화를 들여다보는 까닭이다. 넘쳐나는 대신 그만큼 사라져가는 진정한 스토리텔링 콘텐츠로서 설화의 가치도 뛰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전남 고흥군은 땅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반도의 토양 위에서 먼 옛날부터 이야기가 풍성했던 곳이다. 조선시대 류몽인이 이 곳에서 ‘어우야담’을 쓸 수 있었던 한 배경이기도 하다. 웹툰과 애니메이션, 영화와 드라마 등 다양한 대중문화 콘텐츠의 또 다른 원형일 수도 있을 고흥의 설화를, 스포츠동아가 격주 연재한다.
발포 만호로 부임해 수군과 첫 인연
직속상관에 저항…관직박탈 단초로
18개월 재임 기리며 건립한 충무사
객지서 찾아와 제사 지내는 이 많아
전남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 선창에 고깃배들이 여러 척 떠 있다. 뱃사람들은 어망 손질에 바쁘다. “서대를 잡으러 나간다”고 했다. 가자미와 비슷하게 생긴 서대는 회로 먹으면 맛이 좋다. 인근 나로도항을 중심으로 난류를 타고 많이 잡힌다. 1년 중 봄부터 여름까지가 서대회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계절이다. 고흥의 9미(味) 중 하나이기도 하다. 5월인데도 작열하는 태양빛이 뜨겁다.
어부들의 삶의 터전인 고흥 발포항은 고려말 조선 초엔 왜구가 창궐했다. 1439년(세종 21년) 발포에 해군부대(발포진)가 설치됐고, 임진왜란 때엔 서남해로 진출하는 일본군을 이곳에서 막아냈다. 거북선도 이곳에서 건조됐다고 전해진다. 왜적으로부터 바다를 지켜낸 ‘해군 지휘관 이순신’은 고흥에서부터 시작된다.
● 초급 지휘관으로 모진 18개월
이순신은 36세 때 발포에 만호(종4품의 초급 지휘관)로 부임해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2년 전인 1580년(선조 13년) 7월이다. 32세에 무과에 급제해 함경도 국경을 수비하는 야전에서 육군 초급장교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이순신이 만호로 승진하고 처음 부임한 곳이 고흥이었다. 이때 군종(軍種)도 육군에서 해군으로 바뀌었다. 이순신에게 고흥은 ‘처음’의 의미가 많은 지역이다.
그러나 고흥에 머문 시절은 그에겐 모진 고난의 시기였다.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가 사사로이 관사 앞뜰의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들려 하자 “관아의 오동나무도 국가의 것”이라며 막은 일이 관직박탈의 단초가 됐다. 과거 훈련원 봉사(종8품) 시절, 자신에게 인사 청탁을 했던 옛 상관이 감찰을 왔다가 악의적인 거짓 보고서를 올리면서 이순신은 결국 직위에서 파면돼 18개월 만에 한양으로 돌아갔다.
이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이순신은 계급도 없이 지휘관을 맡아 경상도 바다와 전라도 바다를 오가며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노량해전까지 6년간 22번의 해전을 치렀다.
발포마을을 떠안은 도제산 남쪽 기슭에 발포만호성이 있다. 이순신과 군사들이 머물던 해군부대다. 1490년(성종 21년) 9월 둘레 1360척(약 626m), 높이 13척(6m) 규모의 사다리꼴 성벽이 축조됐다.
성 안으로는 교회 하나가 우뚝 솟아 있다. 성곽 남쪽이었을 곳에는 집채도 여럿이어서 북쪽을 중심으로 560m 둘레의 성곽이 복원됐다. 밭도 가꿔져 있고 잡풀도 무성한 발포만호성 안에는 우물터와 선소(船所)터도 있다. 이 선소터에서 거북선의 하단부가 건조된 것으로 전해진다.
마을주민 박영길(77)씨는 발포만호성 옆 취나물밭을 가리키며 “저 너머가 거북선을 만들던 선소(船所)가 있던 자리”라며 “옛날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이 고증해주신 것”이라고 했다.
발포만호성 언덕 아래엔 작은 만(灣)이 나있다. 굴강(屈江)이다. 이 굴강에는 거북선을 비롯해 3척의 병선이 유사시를 대비해 정박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발포는 발포선소와 본현선소가 있었을 만큼 조선 최고의 수군기지였다. 그리고 조선 후기까지 5호 거북선을 만든 곳이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고흥에서 6차례 군사활동을 전개했다. 전사하기 10일 전까지 나로도에 흥양선소를 설치해 중국 진린 제독과 사변에 대처한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으로 전해 내려온다.
발포마을 입구에 세워진 이순신 유적 기념비. 그 위로 아름드리 팽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있다. 고흥(전남)|김진환 기자 kwangshin00@donga.com
● 유적기념비와 충무사
군내버스가 회차하는 발포마을 입구에 이순신을 기리는 기념비가 서 있다. 어른 키만한 비석엔 ‘이 충무공 머무신 곳’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가곡 ‘가고파’ ‘고향생각’의 노랫말을 쓴 노산 이은상의 글이다.
수백년을 굵어온 팽나무는 수호신처럼 비석 옆에 섰다. 1955년 세워진 이 비석은 먼 섬에서 가져온 돌로 만들었다. 이 돌이 발포항으로 오기까지 소록도 한센인들이 동원됐다. 드럼통을 여러 개 엮어 그 위에 돌을 올려놓고, 돛단배 2척이 양쪽에서 드럼통을 끌면서 발포항으로 왔다. 한센인들은 먼 섬에서 돌을 날라다 드럼통 위에 올렸고, 돛단배의 노를 저었다.
발포항 정자에서 낮술로 한낮의 무더위와 맞서던 한 노인은 “그때, 저 비석이 들어올 때는 동네 구경거리였지”라고 회상했다.
1980년 발포만호성 북쪽 경사지에 충무사가 건립됐다. 이순신의 18개월 재임을 기념하기 위한 사당이다. 이 곳에서는 매년 충무공 탄신일인 4월28일 충무공 탄신제를 지낸다. 충남 아산 현충사의 제사와 같은 날, 같은 시각이다.
박영길씨는 1982년부터 충무사를 지켜온 관리인이다. 커다란 열쇠꾸러미를 들고 나와 충무사의 여러 문을 열어주며 “문을 열어 놓으면 아이들이 뛰어놀다 여러 곳을 망가뜨린다”고 했다. 평소에 잠가두었다가 관광객이나 학생들이 소풍을 오면 문을 열어준다.
완도가 고향인 박씨는 농사를 지으러 고흥으로 왔다 충무사를 지키게 됐다. 그는 “객지 사람들이 엄청 와서 제사를 지내고 간다”고도 했다.
이순신은 현세에서 성웅(聖雄)이라 불리는 유일한 위인이다. ‘거룩하리만큼 뛰어난 영웅’은 500년이 지난 지금도 ‘객지 사람들’을 한반도 남쪽 바다로 끌어들일 만큼 묵직한 메시지로 남아 있다.
● TIP. 설화란?
사람들 사이에 오랜 시간 구전(口傳)돼 내려오는 이야기. 신화와 전설, 민담을 포괄한다. 일정한 서사의 구조를 갖춰 민간의 생활사와 풍습, 권선징악의 가치 등을 담은 이야기다.
● 충무사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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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전남) | 김원겸 기자 gyummy@donga.com